[문화산책] 기억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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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21 07:53  |  수정 2017-03-21 07:53  |  발행일 2017-03-21 제25면
[문화산책] 기억의 조각
박지혜 <영상서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친척들이 모두 모인 외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외할머니의 김치였다.

어려웠던 집안 살림에서 김치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반찬이었는데, 그 자리에는 항상 할머니의 김치가 있었다.

깡마른 몸에 허리가 굽은 할머니는 마른 몸으로 직접 배추농사를 지어 겨울이 올 때마다 김치를 자식네로 보내셨고, 덕분에 우리는 없는 살림 속에서도 김치 하나만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요즘 김치와는 다르게 달지도 않고 젓갈 냄새가 물씬 나는 김치였지만, 익을수록 맛이 깊어지는 김치는 꼭 우리 할머니를 닮아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참 말씀이 없는 분이었다. 명절에 시골집에 모여 투닥거리는 삼촌과 이모를 바라보면서도 그저 웃으시다가, 때가 되면 맛있는 반찬들을 만들어 내고 따뜻한 이부자리를 펴주곤 하셨다. 없는 살림에 힘들어하던 우리 집에 엄청난 양의 김치를 가져다주시며, 우리에게 걱정이나 푸념 한마디 없이 돌아가시는 어른이였다. 나는 그런 외할머니를 참 좋아했다.

늘 조용하고 따스했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정신없던 장례식이 끝이 났다. 장례식장에서 내내 꿋꿋하게 손님을 맞던 어머니는, 집에 남은 할머니의 김치 한 포기를 보고는 김치냉장고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셨다. 할머니의 김치를 기억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 떠나간 자리에는 늘 그 사람의 ‘기억’이 남는다.

그의 한 생애가 아닌, 그가 나에게 주었던 어떤 ‘기억’이 말이다. 그 ‘기억의 한 조각’은 속수무책으로 그 사람의 기억으로 빠져들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 작은 ‘기억의 한 조각’ 안에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감정들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할머니의 김치가 그랬다. 할머니가 보내주시던 김치 속에는 그저 김치가 아닌, 자식에 대한 애정과 염려, 미안함, 격려 같은 것들이 숨어 있었음을 이제는 안다. 할머니가 담가주신 수많은 김치를 먹고 쑥쑥 자란 내 몸 안에는 여전히 할머니의 기억이 세포처럼 남아 있다. 그 기억의 조각은 여전히 따뜻하기 그지없다.

문득 할머니의 김치를 생각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느 순간 떠나게 됐을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것도 나의 어떤 ‘기억’일 것이라는 것을.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을 주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 기억이 우리 할머니의 김치처럼 따뜻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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