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글의 깊이와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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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20 08:02  |  수정 2017-03-20 08:02  |  발행일 2017-03-20 제18면
[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글의 깊이와 생명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형태는 깊이로 보아라. 주가 되는 면을 분명하게 나타내어라. 형태가 너를 향해 있는 것으로 상상하라. 모든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고 안에서 점점 밖으로 퍼져 나간다. 소묘에서 윤곽선을 보지 말고 돋을새김을 보라. 돋을새김이 윤곽선을 결정한다.’ (-오귀스트 로댕, ‘16세의 천재소녀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에게 42세의 대조각가 로댕의 첫 가르침’)

‘나는 처음으로 점토를 보았다. 하늘로 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팔·머리·다리 각 부분을 따로따로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전체 형상의 제작에 덤벼들었다. 모든 것이 일거에 이해되었고, 지금처럼 능숙하게 해냈다. (-오귀스트 로댕, ‘드로잉 학교인 프티드 에콜에서 처음 석고주형 교실에 들어섰을 때의 감동’)

‘아, 첫 작업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더 나은 곳을 얻을 경제적 여유가 없으므로 르브룅가의 고블랭 공장 근처에 있는 마구간을 빌렸다. 빛이 충분히 들어왔고 뒤로 물러서서 실물과 점토상을 비교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창문은 아귀가 잘 맞지 않고 목조 문은 뒤틀려 구석구석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몸이 얼어붙을 만큼 추웠다. 한쪽 구석의 우물은 물이 넘칠 듯 찰랑대서 스며드는 습기가 일년 내내 감돌았다. 지금도 그곳에서 어떻게 버텼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오귀스트 로댕, ‘가난한 장식 하도급을 하던 로댕이 조각을 위해 무리해서 첫 작업실을 마련했던 것을 소회하다’)

‘나는 이 상에 거의 2년을 매달렸다. 당시 나는 24세였고 이미 뛰어난 조각가가 되어 있었다.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형태가 직접 발산하는 빛을 관찰하고 재현했다. 윤곽을 드로잉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관찰하고 재현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나는 열 번이고 열다섯 번이고 새로 시작했다. 결코 근사치에 만족한 적이 없다. 나는 맞닥뜨린 모든 물질적 어려움을 극복했다. 가난한 미술가라면 내 노력을 이해할 것이다. … 절박한 일상의 요구가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게 만들었다. 나는 새벽까지 일했고, 밤에 귀가한 다음에야 다시 작업에 손댈 수 있었다.’ (-오귀스트 로댕, ‘새 작업실로 옮기면서 깨져버려 지금은 볼 수 없는 바쿠스의 무녀 제작기’)

로댕은 미켈란 젤로 이후 가장 위대한 서양의 조각가로 추앙받습니다. 그 위대함은 작품뿐만 아니라 초기의 시련(에콜 데 보자르 세 번 낙방. 생계를 위한 직업 전전. 늦은 데뷔)과 명성을 얻은 뒤의 숱한 주류 예술계의 비판과 질시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한데 있다고들 합니다. ‘모든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고 안에서 점점 밖으로 퍼져 나간다.’ 저는 로댕의 생애를 훑다가 당시 도제(徒弟)였던 끌로델에게 했던 이 말이 글쓰기에도 완벽하게 겹쳐짐을 알아냈습니다. 미켈란 젤로는 ‘나를 꺼내어 달라’는 돌 속의 외침을 듣고 조각했다고 합니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 ‘다나이드’ ‘걷고 있는 남자’를 보며 저는 그 말이 무엇인지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글을 읽기보다 와 닿는 글을 ‘열 번이고 열다섯 번이고 새로’ 읽고 또 읽으며 글의 깊이와 생명을 파악하려 합니다. 참, 릴케도 잠시 로댕의 비서로 있으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해요.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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