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나의 성악이야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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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16 08:05  |  수정 2017-03-16 08:05  |  발행일 2017-03-16 제23면
[문화산책] 나의 성악이야기3
김동녘 <성악가>

2008년 4월28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탈리아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탄 날이다. 같은 비행기 동승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바로 대학교 선배인 테너 노성훈이었다. 어쩌다보니 같은 날 유학길에 올랐고, 난 인천공항까지 함께할 동지가 생겨서 기분이 좋았다.

이탈리아행 비행기도 JAL기(당시 가장 싼 표 중에 하나였다)였고, 인천공항에서 나리타공항까지 같이 타고 갔다. 나리타에서 서로 “꼭 성공해서 연주 때 말고는 한국에 돌아오지 말자”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난 로마로, 성훈이형은 밀라노로 향했다. 그 시기엔 정말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로마로 간 이유는 내가 어릴 적부터 가고 싶었던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이 있었고, 대학교 동문 선배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엔 여자 친구(지금의 아내)가 나보다 한 달가량 먼저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에 도착해 내가 살 집을 처음 보고는 조금 당황했다. 3층 건물 최상층인데 하필 3층 계단만 난간공사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탈리아에는 이런 건물이 많은데 그 이유인 즉 집을 완공하게 되면 세금을 더 내야 되기 때문에 일종의 편법으로 미완공인 채로 입주해서 산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아슬아슬한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음식이 그리워졌다. 말도 잘 안 통하고, 부모님도 보고싶어 얼른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며칠 후 언어학원 등록을 하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매일 공부를 하는데도 손짓 발짓으로 이탈리아어를 하고 이상한 문법으로 이야기를 하는 꼴이 우스웠지만, 내가 꿈에 그리던 유학생활이니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이 날 때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을 지나치며 조만간 입학한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다 첫 시련이 왔다. 외환위기 사태가 벌어져 환율이 급등한 것이다. 입학시험을 위해 언어도 배워야 되고, 개인레슨도 받아야 되는데 돈이 너무 빠듯했다.

그 시기엔 정말 헝그리정신으로 하루하루 겨우 버텼던 것 같다. 그리고 국립음악원 재수라는 둘째 시련을 겪어야 했다. 열심히 해도 모자랄 언어공부에 소홀히 한 것이 재수의 원인이었다.

노래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노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언어였다. 아직도 그 시기가 부끄럽고 아쉽다. 유학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정말 열심히 언어공부를 하고 떠나라고 당부하고 싶다. 김동녘 <성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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