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공원묘지 공연도 마다 않은 형제…잇단 스카우트 제의에 “우린 대구서!”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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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24   |  발행일 2017-02-24 제34면   |  수정 2017-02-24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대구 록의 자존심…20년차 록밴드‘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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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 된 아프리카를 엄지척해주는 드러머 정현규·보컬 윤성·매니저 정현수(왼쪽부터).

서울에 있던 큰 외사촌댁의 누나(한송자)는 동양방송 1기 탤런트였다. 두 외사촌 형도 서울에서 록밴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 가면 그 형이 음반도 사주고 했다. 덕분에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발매된 ‘호텔캘리포니아’가 수록된 이글스 음반을 감상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주말에만 나타났다. 평일 집은 음악판이었다. 반야월 정동고에 다녔던 동생은 집에서 들은 팝송 실력만 믿고 스쿨밴드를 노크했다. 컴백, 센터폴드 등으로 유명했던 제이 게일스 밴드, 영국의 전설적 헤비메탈밴드인 주다스 프레시트의 곡을 불렀다. 동생은 꽤 잘하는 줄 알았는데 밴드의 반응은 냉담했다. 어느 날 드러머 선배가 ‘넌 절대 싱어는 안 된다’고 정색했다. 밴드를 그만뒀다. 어금니를 악 물었다. ‘이 수모를 한국 최고의 드러머가 되어서 보복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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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팬이었다가 드러머의 아내가 된 메인보컬 윤성.

형 정현수와 동생 부부 정현규·윤성
평균 연령 47세의 가족밴드 ‘아프리카’
외가 영향으로 초등생 때부터 음악광

고교 밴드서 ‘넌 싱어 안돼’ 선배 말에
형에게 드럼 배운 동생은 드러머의 길
기획사 속해 서울 진출‘점프’ 활동도

베이스 치는 형은 공연기획도 일가견
제대후 기획무대 대박 계기 기획자 삶
K-팝 챔피언·日 초청공연 등 종횡무진

손인태 이은 보컬 윤성은 동생과 부부緣
정규앨범 3장 등 18개 음반에 100여曲
‘작은새’‘나나나’‘록앤롤타령’ 등 인기


◆아버지…대학 가면 음악 오케이

동생이 밴드에서 쫓겨날 때 형은 음반 수집에만 열을 올렸다. 동생은 베이스 치는 형한테 드럼을 배웠다. 음악을 듣고 드럼 라인을 카피할 수밖에 없었다. 연속 드럼 주법인 ‘필인(Fill-in)’이란 용어도 모른 채 그냥 ‘뚜두두두~’로만 표기했다. 선배들은 한술 더 떠 그 테크닉을 ‘기까끼’라 했다. 다들 그렇게 어리벙벙하게 음악을 배워나갔다.

동생이 재수할 때였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아버지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로커 친구들의 차림은 거의 양아치 수준. 아버지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며 “이거 뭣들 하는 짓이야”라면서 대로했다. 아버지는 음반을 다 찾아내 부숴버렸다. 그 일로 부자 간에 신사협정이 체결된다. 대학만 가면 음악을 해도 좋다는 약속이었다. 동생은 삼수 끝에 경일대 경영학과에 들어간다.

동생의 첫 밴드명은 ‘다크호스’. 스무 살 때였다. 대명동 대구대 에디(EDDY) 연습실에서 배수진을 쳤다. 난생 첫 공연을 대구대 대강당에서 ‘에디 패밀리 콘서트’란 이름으로 올렸다. 그날 하마터면 동생은 불귀의 객이 될 뻔했다. 걸어놓았던 대형 태극기 액자가 떨어진 것이다. 연습실에 있던 음향기를 설치했다. ‘소달구지’ 수준의 음향시스템이다. 드럼도 외제는 언감생심, 그냥 삼익·동신 드럼에 만족했다.

◆동생은 해병대 군악대 출신

동생은 ‘한 드럼 하는 드러머’로 소문난다. 동생은 가디언, 싱글크라이, 길로틴 등을 전전한다. 길로틴에서 기타를 치던 최재혁이 동생을 스카우트했다. 하지만 연습 몇 번 하다가 동생은 과감하게 해병대에 자원한다. 해병대 군악대에서 드럼 등 타악기류를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 무렵 밴드에는 초청공연이 없었다. 연습실 공연이 전부였다. 더욱이 연습실 마련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생각해 보라. 불한당 같은 그들에게 누가 공간을 빌려주겠는가. 동생은 무일푼. 그런 동생을 위해 형이 연습실 보증금까지 대준다.

동생은 중간에 음악을 잠시 그만둔다. 음악 할 돈을 벌기 위해서다. 후배의 러브콜이 들어와서 우연찮게 다단계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이게 아닌가 싶어 발을 뺀다.

형은 제대 후 대구밴드연합인 ‘계시’로부터 공연기획을 부탁받는다. 경북산업대 대강당에서 부산의 밴드 ‘스트레인저’와 대구 밴드 3팀을 묶어 공연을 했다. 2천명이 왔다. 유료입장객만 1천500명. 대박이었다. 형은 그 인연으로 공연기획자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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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에서 비로소 길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아프리카의 좌장격인 정현규.

◆드럼 연습실 숨은 이야기

동생은 실력 연마를 위해 경일대 동아리 밴드였던 ‘뮤즈’ 연습실에서 살았다. 하지만 계속 거기에만 있을 수 없었다. 드럼 연습실을 찾아다녔다. 당시 건물주는 음악 한다고 하면 다들 기겁한다. 그래서 미술 한다고 둘러댔다. 계란판, 합판, 스펀지 등을 갖고 두 달간 방음공사를 했다. 바닥에 모래를 깔거나 큰북 안에 이불과 옷을 쑤셔넣어야만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방음을 한 뒤 첫 합주를 했다. 어이쿠, 5분도 안 돼 주인이 시퍼런 표정으로 내려왔다. 그런 어느 날 대구에도 드럼 전문 합주실이 등장한다. 청구고 근처에 생긴 ‘필인’이다.

형제는 자기만의 록밴드가 절실했다. 경일대 뮤즈의 보컬리스트 손인태(현재 생수 배달 사업가)를 만난다. 그 친구와 손을 잡는다. 그렇게 해서 ‘아프리카’가 탄생한다. 팀명은 동생이 생각한 거다. 파리, 모기, 사운드키, 에이스 등을 생각했지만 별로였다. 그러다가 어떤 밴드가 미국의 록밴드 토토의 대표곡인 아프리카를 연습하고 있는 걸 보고 아프리카로 찍어버렸다.

음악을 사랑하는 만큼 생계는 항상 ‘지옥’. 형은 한때 대구백화점 앞에서 잘나가는 불법테이프 노점상이었다. 2년 만에 빚을 얼추 갚는다.

아프리카 진용이 더 굳건해진다. 손인태에 이어 기타리스트 유기현(현재 천안 거주), 강현우(서울에서 액세서리 사업 중), 김도형 등이 가세한다. 회사원이 됐다가 못 견디고 나와 2012년 아프리카에 합류한 조건호 덕분에 아프리카는 더 깊숙한 울림을 피울 수 있었다. 경일대 MT 초청공연이 데뷔무대였다. 당시 대구 밴드는 하드코어, 펑크 등이 주류였는데 아프리카는 정통록에 가까운 하드록을 장전한다.

◆악몽 같은 공원묘지 공연

무명밴드의 설움. 밴드를 해 본 자만 안다. 밴드정신이 충천하는 그런 무대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단감축제, 영덕대게축제, 영양고추축제 등 각종 로컬 축제에 불려다녔다. 무명의 아프리카는 아주 싸게 시간을 땜질해주는 악사였다. 레퍼토리를 제출하면 관계자는 자기 아는 곡만 추리고 나머지는 빼라고 강요했다. 신나는 게 우선이고 필은 거부당했다. 어떤 때는 지방 트로트 가수의 반주밴드로 추락하기도 한다. 우린 뮤지션이 아니고 행사 도우미였다. 누군 록밴드는 출연진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황성옛터 반주도 강요했다. 어느 호프집에 불려갔다. 록밴드 불러 놓고 통기타 음향보다 더 작게 볼륨을 주었다. 이게 아니다 싶어 짐 싼 적도 부지기수였다. 한번은 칠곡의 한 공원에서 공연한다고 해서 갔다. 그런데 묘지였다. 현대공원 개원 관계자 자축연 자리였다. 거기서 레드 제플린 곡을 연주했다. 아무도 무대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기획자의 농간도 엄청 심했다. 다섯 군데 공연하면 2~3개는 떼였다. 그런 수모의 나날이 오히려 오늘의 아프리카를 다졌다.

◆아프리카의 저력

지하실에도 햇살이 돋기 시작했다. 2003년 제1회 K-pop 챔피언 및 핫뮤직상을 받는다. 2008년에는 일본 밴드 ‘츠바키’가 도쿄로 불렀다. 송골매 헌정앨범 제작에 참여했고 ‘낭만고양이’를 띄운 체리필터 기획사, 죽은 래퍼 거북이를 키운 기획사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다. 그대로 나갔다면 크라잉넛, 노브레인 정도로 클 수 있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한 기획자 때문에 다시 대구에 남는다. 그게 더 잘 된 일이란 걸 후에 알게 된다.

어느 날 노래 잘하는 여성팬이 나타났다. 바로 손인태에 이어 2대 아프리카 보컬이 되는 안동 출신의 윤성이었다. 가톨릭대 캠퍼스밴드 ‘인트로’의 메인 보컬인 그녀는 원래 성악가 지망생. 록 때문에 진로를 바꾼다. 그녀의 집안에서도 난리가 났다. 지역 여성 하드록 싱어 1호였다. 곧 육심근이 이끄는 ‘대일밴드’ 보컬이 된다. 어느 날 동아쇼핑 야외무대에서 아프리카 공연에 감전된다.

윤성이 들어오면서 아프리카도 달라진다. 남자 보컬 때는 공연이 무척 공격적이었다. 윤성이 오면서 사운드가 부드럽고 가벼워지고 대중적이 된다. 지금까지 정규앨범 3장 등 음반 18개를 낸다. 작곡은 동생이 주로 한다. 100여 곡 중 작은새, 나나나, 바보, 록앤롤타령 등이 꽤 알려졌다.

2011년 동생과 윤성은 부부가 된다. 현재 둘은 대구 달서구 도원동의 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윤성은 남편을 ‘형’이라 부른다. 길에서 만난 미지, 미로, 미오, 미노 등 고양이 4마리를 자식처럼 데리고 산다. 아직 돈보다 음악 때문에 싸운다. 둘은 ‘록밴드에 생활고가 전공필수’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이젠 정해진 개런티는 1원도 깎아주지 않는다. 적정 공연료 고수. 이건 자존심이자 더 어려운 후배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형은 월세방에 있으며 현재 STA란 악기대여업을 하고 있다. 2006년 삼각로터리 근처에 아프리카 실용음악학원을 연습실을 겸해 오픈했다. 현재 직장인밴드 ‘인카운터’, 효성초등학교 ‘록키즈’ 등 4개 밴드를 레슨해주고 있다.

참 많은 세션맨이 아프리카를 거쳐갔지만 형제와 보컬라인은 부동이다. 록을 통한 민주공화국인 ‘록퍼블릭(Rockpublic)’을 꿈꾼다. 레미디, 라이브오, 두고보자, 오일밴드, 당기시오, 카노 등 지역의 메이저 록밴드와 클럽무대인 헤비, 레드 제플린, 라이브인디, 쟁이, 어반, 락왕 등을 ‘록연맹’으로 묶어보고 싶다.

음악에 반기를 들었던 여든의 아버지. 무척 수척해진 그분이 일본 지인한테 아들 음반을 보내 실력 체크까지 해주셨다. ‘인생사 새옹지마’랄까!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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