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악법도 법이라고?

  • 이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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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23   |  발행일 2017-02-23 제30면   |  수정 2017-02-23
[취재수첩] 악법도 법이라고?

어느날 문득 승병(僧兵)에 대한 의문이 생긴 적이 있다. 지난한 역사 속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지만, 결과적으로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 계율에 반한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 오늘날까지 이름이 전해진 여러 승병이 앞장서 국난의 상황마다 뛰어난 활약을 보인 것은 계율에 앞서 호국이라는 대의(大義)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풀 한 포기, 개미 한 마리 밟기를 조심스러워하는 이들이 나라의 난세를 바로잡기 위해 저마다의 신념을 잠시 접은 것이다. 스스로 짊어져야 할 과보에 대한 수많은 고민과 그로 인한 심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지금, 정부가 정한 ‘대의’를 위한 서민들의 희생을 생각해본다.

지난해 9월 말,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이른바 김영란법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시행 이전부터 우려는 상당했다. 당장 고급 음식점의 예약 취소가 줄을 이었다. 그래도 김영란법은 예정대로 시행됐다. 그동안 사회의 고질병이었던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기에. 청렴사회를 위해서라기에.

그렇게 관공서 인근 식당을 찾던 손님은 반토막이 났다. 밥 한끼 먹자는 말조차 조심스러워진 사람들은 옆자리 동료와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폐업하는 음식점도 늘었다. 청렴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대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세 음식점들은 인건비 부담에 종업원을 내보냈다. 음식서비스 업종의 일자리 수십만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식당마다 식재료를 납품하던 업체도, 농산물을 수확하는 농민도 가랑비에 옷 젖듯 악화되는 상황을 감내해야 했다.

김영란법이 시행된 지 5개월째, 이번에는 전기안전법이 이슈로 떠올랐다. 정부는 전기, 유아용품 등에만 한정됐던 KC인증을 사람의 피부에 닿는 모든 생활용품으로 확대했다. ‘국민 안전’을 위해.

영세 소상공인들은 품목별로 수십만원의 인증비용을 추가로 부담하게 됐다. 그렇게 오른 제작비용이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이어졌다. 소상공인들의 씨를 말린다는 비판에 정부는 최근 법시행을 유예하고 개선점을 찾겠다는 말을 내놓으며 한발 물러섰다.

김영란법, 전기안전법의 공통점은 모두 ‘민생악법’이라는 비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악법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는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보다 소를 위한 대의 희생이 크기 때문이 아닐까. 크고 작음을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청렴하고 안전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소상공인들의 희생은 지나치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의를, 나라를 위한 승병들의 희생은 후대에도 빛나지만 나라가 정한 법에 의한 이들의 희생은 그저 폐업자가 한 명 더 추가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취재차 만났던 한 상인의 말이 떠오른다. “악법도 법이라고? 그래, 법이니까 어쩔 수 없이 지켜야지. 그런데 국민을 위한 거라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을 오히려 법으로 옭아매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봐요."

이연정기자<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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