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다시 봄꽃!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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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22   |  발행일 2017-02-22 제30면   |  수정 2017-02-22
20170222
이 춘 호 주말섹션부 차장

잎·꽃·열매의 삼권분립
그게 진정 ‘나무의 길’
독점없는 계절이 참 자연
봄 위해 겨울을 포기한
입춘철학 봄꽃에서 배워야


지난 4일은 입춘(立春). 아직 겨울인데 봄이라? ‘계절의 역설’일까. 명목계절과 실질계절은 그렇게 늘 한 템포 차이가 난다. 자전과 공전의 서로 다른 기울기처럼. 절망인 것 같은데 그 속에 희망이 중첩돼 있다는 것. 그게 삶의 묘리 같다.

요즘 자연인이 부쩍 많아졌다. 그들은 시간을 버리고 ‘세월’이란 시계를 보고 산다. 땅이 일어날 때 일어나고 땅이 잘 때 같이 잔다. 그게 세월스럽게 사는 걸까. 그들은 그 어떤 계절보다 ‘봄의 기척 알아차리기’에 만전을 기한다. 바람 한 가닥에서도 ‘조춘(早春)의 징조’를 포착한다.

선비들의 ‘영춘례(迎春禮)’는 남달랐다. 퇴계 이황은 입춘 직후부터 조석으로 매분(梅盆)에 눈길을 준다. 설중매만의 암향(暗香)을 친견하기 위해서다. 퇴계는 매화를 도반으로 여겨 ‘매형(梅兄)’이라 불렀다. 임종 직전에도 매형한테 물주는 걸 잊지말라고 당부했다.

다산 정약용도 한 풍류를 일궈냈다. 그는 ‘죽란시사(竹欄詩社)’란 풍류계(風流契)를 애지중지했다. 14명이 계원이었는데 모이는 날짜도 굳이 정하지 않았다. 그냥 매화꽃 피는 날 정도로 초봄 미팅 날짜를 운치있게 정했다. 조순 전 서울시장, 김종길 시인 등이 주축을 이뤄 지난 34년간 한시짓기 모임을 지속해 온 ‘난사(蘭社)’도 죽란시사의 맥을 잇는 것 같다.

대구에서도 그런 모임이 하나 태어났다. ‘풍류인문학’을 선도하고 있는 모 기업인이 지난 10일 전국 명사 15명을 초청해 자기 풍류방에서 ‘매화시사’를 열었다. 그걸 연례화할 모양이다.

쇠 같은 나뭇가지에 고이 장전된 꽃망울. 그 꽃망울 뒤에 움이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 중이다. 꽃이 지면 잎이 돋아날 것이다. 잎은 ‘염치’가 있다. 절대 꽃의 길을 짓밟지 않는다. 잎이 꽃을 짓밟으면 열매도 없다. 열매가 없으면 나무도 존재할 수 없다. 나무란 뭔가? 잎·꽃·열매가 입법·사법·행정처럼 ‘삼권분립’된 것이다.

무표정한 저 겨울나무. 겨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춘을 기점으로 봄에 ‘대권’을 이양한다. 겨울에서 봄으로의 권력이양은 ‘계절미학의 백미’인 것 같다. 겨울은 왜 ‘겨울 지상주의’만을 고수하지 않을까. 난 그게 늘 궁금했다. 아직 만족할 만한 답은 알지 못하지만 대충 이런 생각을 해봤다. 자연의 이법, 그건 어떤 에너지를 절대 독점하지 않고 공유하고 배려하는 것. 봄·여름·가을·겨울은 결코 계절을 독점하지 않는다. 그래서 계절은 비로소 ‘자연’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죽었던 가지에 생명이 돋아난다는 건 참 잔인한 일이다.

봄의 이미지를 가장 강렬하게 표현한 두 시인이 있다. 고월 이장희와 T. S. 엘리엇인 것 같다. 고월은 자신의 대표시 ‘봄은 고양이로다’에서 봄을 ‘고양이’로 봤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엘리엇은 1922년 장시 ‘황무지’에서 4월의 봄을 ‘잔인하다’고 묘사했다. 그 시를 한국에서 처음 번역한 사람은 김종길 시인. 그가 1947년 고려대 영문과에 편입한 직후다.

봄꽃. 나는 그게 느낌표인지 물음표인지 아직 분간이 안간다. 살아갈수록 느낌표는 아닌 것 같다. 자연이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 같은 것. 봄꽃을 본다는 일은 참으로 아득하고 섬뜩한 일이다. 결코 아름답지 않다. 꽃은 분명 하나의 진실이지 진리가 아닌 탓이다.

자기 삶의 계절은 늘 겨울뿐이라고 자탄하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누구의 삶에도 봄이 없기야 하겠는가. 있는 데도 없다면서 서둘러 봄꽃을 포기하고 삶을 접는 이들. 봄꽃은 그들에게 뭐라고 할까. 탄핵의 겨울에 피어오른 저 촛불과 태극기. 서로 저주하지만 실은 같은 봄꽃 아닌가.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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