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대통령의 空約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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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20   |  발행일 2017-02-20 제31면   |  수정 2017-02-20
박규완 논설위원
[월요칼럼] 대통령의 空約
박규완 논설위원

‘두 번의 대선 공약(公約), 두 번의 백지화’. 영남권 신공항의 운명을 축약한 표현이다. 영남권 신공항 건설은 2007년 이명박 후보의 대선 공약이었지만, 이명박정부는 2011년 없던 일로 돌렸다. 영남권 신공항 건설은 다시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의 공약으로 채택됐다. 하지만 박근혜정부 역시 지난해 6월 영남권 신공항을 백지화하고 김해공항 확장으로 미봉(彌縫)했다. 그러곤 대선 공약을 파기했다는 비판이 나오자 정부는 김해공항 확장이 아니라 김해 신공항이라고 우겼다. 당시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은 관제탑을 하나 더 지으니 신공항이 맞다고 강변했다. 언어도단이자 궤변이다. 지금 대구는 민항 대구 존치냐, K2·민항 통합이전이냐를 두고 거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또한 영남권 신공항 건설이 사달 난 탓이다.

반추해 짚어보니 박근혜정부의 대선 공약 파기는 영남권 신공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65세 이상 모든 고령자에게 월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당시 진보 진영의 문재인 후보가 제안한 노령연금보다 더 파격적 공약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재벌개혁을 통해 건전한 경제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경제민주화 공약도 유권자의 눈길을 끌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집단소송제 등이 포함된 경제민주화 공약은 새누리당 정강·정책의 맨 앞쪽에 배치됐다.

기초연금 및 경제민주화 공약은 고령층과 중도층의 표심(票心)을 유인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만큼 자성(磁性)이 강한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정부는 이 두 가지 주요 공약을 사실상 다 파기했다. 기초연금은 재정 악화 구실을 내세웠고 경제민주화는 대기업 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는 핑계를 댔다. 어느 순간부터 박 대통령은 ‘경제민주화’라는 말조차 경원하는 듯했다. 하기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본질이 재벌기업으로부터의 출연(出捐)이고 보면 현 정부에서 경제민주화는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미션이었던 셈이다.

지역 거점대학 육성도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그러나 거점대학 육성은 허언(虛言)이 됐고, 교육부와 청와대는 국립대 총장 임용을 둘러싼 분란만 야기했다. 대학총장추천위원회의 정상적 절차를 거친 1순위 총장 후보를 배척한 건 변명의 여지없는 교육농단일 뿐이다. 지역 거점대학으로 올라서야 했을 경북대는 오히려 교육농단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공약을 지키기보단 정권 입맛에 맞는 총장 간택에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2010년 1월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당시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와 박근혜 전 대표의 논쟁이 벌어졌다. 정 대표는 수정안에 반대하는 박 전 대표를 고사(故事) 미생지신(尾生之信)에 나오는 미생에 비유했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미생은 애인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폭우가 쏟아지는 데도 다리 밑에서 계속 기다리다가 익사한다. 흔히 융통성 없이 원칙만 고수하는 사람을 빗댈 때 원용(援用)된다. 발끈한 박 전 대표는 반격했다. “미생은 죽었지만 귀감이 됐고, 애인은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승자는 박 전 대표였다. 이후 그는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각인됐다. 하지만 대통령 박근혜는 주요 대선 공약을 대부분 파기했다.

조기 대선이 유력해지면서 대권 주자들의 공약 경쟁도 뜨거워지고 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기초연금·경제민주화 공약이 승패를 갈랐듯 한 방의 ‘좋은 공약’은 청와대로 가는 추동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실천이 불가능해 보이는 공약도 여과 없이 쏟아진다. 지난 두 번의 영남권 신공항 백지화는 우리에게 공약 검증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 당장 눈에만 쏙 들어오는 공약에 현혹되지 말고 실현 가능한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야구에서 타율이 높은 타자의 공통점은 선구안이 좋다는 것이다. 나쁜 공을 걸러내는 능력이 좋은 타격의 관건이라는 의미다. 유권자도 타자처럼 선구안을 길러야 한다. 아무리 번드르한 공약도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으면 ‘나쁜 공약’이다. 공약(空約) 확률이 높은 공약(公約)을 걸러내는 게 유권자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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