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밀양 삼랑진 작원관지·작원잔도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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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7   |  발행일 2017-02-17 제36면   |  수정 2017-02-17
벼룻길 아래 부딪는 강물 소리에 심장도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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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길 벼랑 아래의 작원잔도. 철길을 놓으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일부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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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 제일 관문이었던 작원관지의 한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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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원마을에서 낙동강으로 통하는 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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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원마을 앞 작원나루. 옛날에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었는데 지금도 배 몇 척이 정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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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원잔도. 거칠게 다듬은 듯한 돌을 조적해 벼랑길을 만들었다.

부산에서 청도를 거치고 조령을 넘어 한양까지 열나흘 길 영남대로(嶺南大路). 길 내어 황토 깔고, 길 내어 박석 깔고, 요해에는 문을 둔 나라의 중요한 길이었다. 가장 빠르게 도달하기 위해 때로는 천야만야 깎아지른 벼랑에도 길을 내었다. 영남지방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고려시대부터 요새를 두었던 나라 제일의 요충지 삼랑진에도 그러한 문과 길이 있었다. 작원관지와 작원잔도다.

여관·관청·나루터 역할하던 ‘작원관’
천태산 자락 벼랑의 영남대로 첫 관문
왜적 막던 요새로 1995년 現 자리 조성

‘깐촌’ 작원마을 굴다리 지나자 바로 江
양산 원동까지 강·벼랑 사이 ‘작원잔도’
문경 관갑잔도 등과 함께 험하기로 유명


◆영남대로의 제일 관문, 작원관지

밀양의 동남쪽 끝에서 양산, 김해와 접경을 이룬다. 경부선과 경전선이 분기하고 대구부산고속도로가 지나가며 밀양강이 낙동강 본류에 흘러든다. ‘세 줄기 큰 물결이 부딪쳐 일렁이는 나루’ 삼랑진(三浪津)이다. 큰 강 낙동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다 남쪽으로 꺾이며 폭이 좁아지는 자리, 천태산 자락의 벼랑이 낙동강에 내리 꽂히는 자리에 영남대로의 첫 관문인 작원관(鵲院關)이 있었다. 원(院)과 관(關)과 진(津)의 역할을 담당하던 그 문은 산세가 험해 날짐승들만 넘나들 수 있다 하여 까치 작(鵲)이라 했다.

지금 작원관지는 삼랑진읍에서 약 2㎞ 떨어진 낙동강변 경부선 철길 옆에 자리한다. 가파른 산과 강 사이 좁은 땅이다. 원래의 자리는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한다. 1900년 초 일제에 의한 경부선 철도 공사로 원래의 자리에서 밀려났고 1936년에는 대홍수에 휩쓸려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 것을 1995년 현 자리에 새로이 조성했다. 문은 ‘한남문(南門)’, 남으로부터 올라오는 왜적을 막아낸다는 뜻이다.

왜적. 이곳에 무려 1만8천700명의 왜적이 진격해 온 적이 있다. 1592년 4월17일, 임진왜란 발발 나흘 뒤였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이틀 만에 함락시키고 거침없이 북진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작원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진군을 저지한 것은 밀양부사 박진과 민관군 300여명이었다. 우리군은 이 좁은 길목에서 왜적과 싸웠다. 기록에는 백병전까지 벌였다고 한다. 작원관 전투는 임란사에서 전쟁다운 전쟁으로 꼽히며 박진 장군은 임란 초기의 장수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로 평가된다.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 사야가(김충선)가 투항한 이가 바로 박진 장군이다.

한남문 옆 산중턱에는 ‘작원관 위령탑’이 서있다. 탑에는 왜적과 싸우는 장군과 군관민의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위령탑 앞에 서면 한남문루와 그 너머 가로놓인 철길, 낙동강이 남쪽으로 굽어지는 모습과 먼 낙동대교가 한눈에 보인다. 낙동대교 위로는 대구부산고속도로가 지나간다. 낙동대교 너머에는 삼랑진교, 그 너머에는 경전선 철길이 강을 가로지른다. 참으로 시원스러운 풍경을 앞에 두고, 지난 연말 이곳의 일몰이 참으로 서글펐다는 이를 생각한다.

◆자전거길 옆 작원나루와 작원관 옛터

작원관지 바로 남쪽은 ‘깐촌’이라 불리는 작원마을이다. 차가 닿는 길의 끝, 철길 아래 굴다리 너머가 눈부시다. “거기 암 것도 없어요. 강 있고 자전거길 있고, 그게 다예요.” 굴다리를 지나자 덥석 놀란다. 너무 시퍼런 강물이 코앞이라 쑥 끌려들어 갈 듯하다. 강이 있다. 강 따라 자전거길이 있다. 그리고 나루가 있다. 작원나루다. 옛날 마을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었는데 잡은 물고기를 대야에 이고 삼랑진이나 인근 산골 마을을 다니며 팔았다고 한다. 나루에는 지금도 몇 척의 작은 배가 정박해 있다.

자전거길 따라 남쪽으로 간다. 강과 철길과 함께다. 철길을 떠받친 옹벽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잠시 후 대숲을 지난다. 강 위의 숲이라니 멋지다. 영남대로에는 100여 곳의 주막촌이 형성돼 있었는데, 원래의 작원관 부근 대밭자리에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작원관 문이 일몰과 함께 닫히면 나그네들은 주막에 머물러야 했다. 주모들은 손님을 많이 모으려 작원관 포졸에게 뇌물을 주고 문을 빨리 닫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대숲이 주막 자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과연 대밭 지나 잠시 후 ‘작원관 최초 터’가 나온다. 작원관을 언제 건립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7세기 이후 이곳에 위치했다는 설명이다. 당시의 현판은 밀양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다.

◆영남대로 벼랑길 작원잔도

한참 동안 데크 길이 이어진다. 물빛과 햇빛에 눈이 아리다. 낮고 깊은 강물 소리가 끊임없다. 물결이 데크 길 긴 다리에 부딪힐 때마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흔들린다. 이 자전거길이 놓이기 전 아주아주 오래전에는 낙동강과 산이 딱 붙어 있었고 영남대로는 그 산사면의 깎아지른 벼랑에 아슬아슬 놓여 작원잔도(鵲院棧道)라 불렸다. 삼랑진 깐촌에서 양산 원동 용당리에 이르는 꽤 긴 길로 양산 황산잔도(黃山棧道), 문경 관갑잔도(串岬棧道)와 함께 영남대로에서 험하기로 이름난 벼랑길이었다.

혹여 잔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약 1.5㎞쯤 나아갔을 때 엄청나게 솟구친 천길 벼랑 아래서 옛 잔도를 만났다. 일제가 경부선 철도 공사를 벌일 때 이 구간은 철도마저 놓을 수 없어 터널을 뚫은 자리다. 천길 벼랑이 잔도를 보존하게 한 것이다. 잔도는 벼랑에 겨우 매달려 있다. 돌을 다듬어 조적해 낸 한 뼘 길. 차안과 피안의 경계마냥 신비롭기까지 하다.

영남대로는 관로(官路)여서 양인이나 하층민이 함부로 다닐 수 없었다. 누군가의 오체투지와 같은 길, 그러나 함부로 다닐 수 없는 길. 여기에는 밤새 씨줄 날줄 엮어 기어코 긴 삼베자락 지어낸 여인들처럼, 돌 하나하나 다듬고 한발 한발 전진해 길 놓은 이름 모를 사내들이 있었을 것이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 파동에서 가창 팔조령 넘어 청도와 밀양 가로질러 삼랑진으로 간다. 대구부산 고속도로 삼랑진IC에 내려도 된다. 삼랑진읍에서 1022번 지방도를 타고 양산방향으로 약 2㎞ 가면 오른쪽 검안교 앞에 작원관지 안내판이 있다. 다리 건너 들어가면 넓은 주차장 지나 작원관지가 보인다. 바로 옆 길 끝에 작원마을이 있다. 마을 앞 굴다리 지나 왼쪽 자전거 길로 약 1.5㎞ 가면 작원잔도를 볼 수 있다. 잔도에서 몇 걸음이면 밀양과 양산 경계다. 거기에서 데크길은 끝나고 시멘트길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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