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영의 포토 바이킹] ‘조선의 인재향’ 선산대로 <상>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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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7   |  발행일 2017-02-17 제35면   |  수정 2017-02-17
라이딩 코스 구미버스터미널~지산동 발갱이들~매학정~관심리~오로리~선산읍성 낙남루~이문리 서당공원태
묻고 물어 찾은 김재규 생가 인근 박정희 생가 안내판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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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방 유적지로 기념하고 있는 선산읍 이문리 서당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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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과 선산대로 사이 국도 대체우회도로 공사가 진행 중인 항곡4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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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읍과 해평면을 잇는 숭선대교에서 내려다본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의 매학정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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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읍과 선산읍을 연결하는 선주교 아래 감천의 모래와 물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준다.

'영남정신’ 재확인하려 낯선 선산行
영남대로였던 33번국도 달리노라면
사육신부터 대구경북 역사의 X파일
왠지 모를 역사적 무게감 되살아나

발검평야 ‘지산발갱이들소리’유래비
'후삼국 통일 현장’글귀 경이로운 감동
낙동강변 경승지 ‘매학정’거쳐 관심리
國唱 박녹주 고향엔 동상 하나 없어


‘탄핵대길’ ‘탄핵반대’ 구호 사이로 자전거의 봄이 오고 있다. 촛불은 태극기 바람에 흔들리며 펄럭거린다. 움츠렸던 자전거 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입춘 다음 날, 선산행 버스를 타고 역사적 선산을 라이딩하고 싶었다. 일기예보는 비가 온다고 해 새벽잠을 잤다. 일요 라이딩은 포기하고 슬리핑 선데이를 보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화창한 봄날에 놀라 깨어난 건지 시곗바늘을 보니 오전 10시8분이었다. 일기오보에 감사하며 10시40분 선산터미널행 버스를 타기 위해 북부정류장까지 온 힘을 다해 질주했다. 도착하니 10시37분이었다. 선산행 표를 달라고 했더니 “10시20분에 출발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버스 시간표가 일부 변경된 것이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10시40분 구미로 가는 버스를 탔다. 라이딩 계획은 상당 부분 헝클어졌다.

북부정류장에서 구미터미널까지는 1시간이 걸렸다. 선산대로에서 버스타고 라이딩 연습을 ‘홀라’(홀로라이딩)를 시작했다. 선산시장 근처 이문리의 김재규 장군 고향집에서 낙동강자전거길 해평 철새도래지를 거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상모동까지 달려보겠다는 애초 계획은 부는 바람이 갈라놓았다. 우리 국토 어디에나 나그네와 소통하는 길선생님들이 사신다. 나는 이 길에서 영남정신을 배우고 깨닫고 느끼고 있는 것을 재확인하고 돌아갈 것이다.

선산으로 가는 길은 진안고속 버스 기사가 가르쳐줬다. 그의 말대로 쌩쌩 달리는 차들이 나를 바짝 ‘쫄게’ 했다. 선산이라고 쓰인 도로표지판을 따라가니 고가도로 같은 것이 나왔다. 원평1교와 원지교였던가 보다. 구미 시내 한복판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산대로는 비교적 갓길이 넓어 ‘홀라’ 해도 좋을 코스로 다가왔다. 33번국도로 바뀐 영남대로를 달리는 역사적 무게감이 되살아났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운 길 위에서 ‘지산발갱이들소리’ 유래비를 아는 사람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발갱이들소리는 고아읍과 지산동에 전해지는 경북무형문화재 제27호 논매기소리로, 왕건 설화가 융복합된 히스토리텔링 농요다. 발갱이들은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을 사로잡았다고 하여 발검평야(拔劍平野)라고 불리었으며, 이것이 ‘발검들’ ‘발갱이들’로도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발갱이들소리 유래 비문엔 “서기 936년 후백제의 2대왕 신검이 고려 태조에게 쫓기던 끝에 이 앞뜰에서 사로잡히고 군사는 섬멸되었다고 해서 민족을 통일한 거룩한 역사의 현장”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눈알을 빙빙 돌리게 하는 글이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가능하게 했던 일리천대첩 현장이 발갱이들소리로 연결되다니 가짜뉴스라도 좋을 특종 비문이었다. 고려사(세가 권제2)는 “936년 가을 9월. 왕이 삼군(三軍)을 통솔하여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러 군대를 합치고 일선군(一善郡)으로 진격하였다. 신검(神劍)이 군대로 막아서니,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고 전한다. 구미터미널에서 3㎞를 달리지 않았는데 역사적 복음을 발견한 기쁨에 룰루 ‘홀라’를 외쳤다.

다음은 이 길 어딘가에서 태어나 조선의 명창으로 자라난 ‘동백꽃’ 김유정의 연인 박녹주의 소리 길을 찾아간다. 인터넷으로 수소문해보았으나 제대로 된 정보를 건지질 못했다. 고아읍 관심리가 전부였다. 관심리에 닿기 전 선산대로와 숭선로가 만나는 고아읍 봉한리 숭선교 앞 삼거리에서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매학정’ 안내표지판을 발견하고는 숭선대교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다. 매학정은 율곡 이이 선생의 동생인 옥산 이우가 장인 고산(孤山) 황기로의 대를 이어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연마하던 낙동강변 경승지이다.

표지판은 매학정이 숭선대교 건너편 ‘해평석조여래좌상’과 한 몸인 것처럼 안내를 하고 있어 헛고생을 해야 했다. 구미청소년 수련원이 보이는 대교에서 뒤돌아 예강리 강정길을 통해 찾아간 매학정 일원은 낙동강자전거길의 휴식 명소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고산 황기로는 정암 조광조 선생의 구명 활동을 하다 화천군 심정의 꾐에 빠져 탄핵 주도로 돌변했던 황계옥의 아들로 벼슬길을 포기하고, 매학정 일원에 파묻혀 글씨 하나로 일생을 보낸 처사다. 인물중심 문헌설화집인 ‘해동잡록’에는 “황계옥은 조정암을 구하는 소와 죄를 청하는 두 가지 소를 지어서 흉악한 짓을 행하였으니, 그 간특하고 사휼한 형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꾸짖고 있는데, 상소 내용은 “조 아무개는 옛 법도를 어지럽게 하고, 당파를 만들어 나라를 그릇되게 하였으니 청컨대 법으로 처치하소서”였다고 한다.

선비의 세계에서 도저히 고개 들기 힘든 부친의 과오. 그 허물을 속죄하는 심정으로 은거처사의 길을 선택한 고산은 송나라 서호의 임포를 롤모델로 삼아 필묵(筆墨)과 독서를 즐기며 방외지사(方外之士)로 살았다. 그런데 후학들로부터는 “보통 사람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휘갈겨 쓴 이른바 광초(狂草)라는 독특한 서체를 구사했으며, 조선의 초성(草聖)이라 일컬어졌다”(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부 학예실장)는 찬사를 받고 있다.

아버지가 안긴 트라우마를 잘 이겨낸 고산의 처세에서 영남 선비의 정통이 어디에 은거하는지를 확인한다. 그는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초서로는 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제1인자라는 평을 받았다고 하는데 금시초문일 따름이다. 대가 끊겨 덕수이씨 율곡 선생의 명성이 더 크게 드리워진 예강리의 매학정에서 동국초성 황기로는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아들 삼고 사는 현대인의 아버지로 재조명되는 흐름을 읽었다. 지었다 불타 없어지고 갖은 풍상 겪으며 누대에 걸쳐 만들어진 매학정은 또 누군가의 손에 의해 더욱 나아질 것이다.

고산 황기로, 옥산 이우의 이야기에 ‘홀릭’하게 만든 매학정을 빠져나온 길은 항곡4길이었다. 예강2리 마을을 빠져나오니 너른 들이 펼쳐졌다. 들판과 선산대로 사이로 4대강 사업 공사현장에서 보이던 불도저와 포클레인이 일요 휴무를 하고 있었다. 선산대로에 합류하니 길 건너로 접성산산림욕장, 예강1리마을회관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고아읍 하면 떠오르는 국창 박녹주 선생의 고향으로 알려진 관심리(원3리)가 나왔다. 관심리 또한 태조 왕건이 매봉산을 사이에 두고 신검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를 주둔시킨 ‘어검(御劒)평야’ ‘어갱이들’ 지명설화가 전하는 일리천전투의 무대였다. 관심리 마을 입구에 박녹주 선생 동상이나 기념비를 예상하며 둘러보았으나 허탕을 치고 나왔다. 그가 태어난 관심리 437을 뒤늦게 안 사실이 참 허탈했다. 셋집을 전전했던 그는 말년에 선산읍 노상리에서 잠시 살다 1979년 서울 면목동 단칸방에서 머리맡에 인생백년이란 글을 써두고 쓸쓸하게 운명했다고 한다. 선산읍 노상리 마을회관 앞 놀이터에 세워져 있다는 인생백년 노래비는 방 한 칸 없이 떠도는 인생들을 위해 세워진 기념비일까.

“인생백년이 어찌 이리 허망하냐. 엊그제 청춘홍안이 오늘 백발이로다. 인생백년 벗은 많지만 가는 길엔 벗은 없어라.”

그녀가 타계한 5월26일, 노상리 인생백년 비석 앞에서 판소리 한마당으로 기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약간 허탈한 마음으로 고아버스정류장과 고아성당이 있는 관심권을 벗어났다. 눈앞의 선산 6㎞(상주 47㎞) 도로표지판을 보니 자동차를 타고 가본 선산시장이 그려졌다. 대망천이 지나가는 오로교, 오로네거리를 지나면 선산읍으로 들어선다.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일리천전투지로 비정되는 감천을 경계로 선산읍과 고아읍이 나뉘었다. 그 길 어디선가 길재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금오서원을 발견했으나 귀로에 찾아보기로 하고 선산시장 쪽으로 직행했다. 1호광장 교차로 너머로 선산읍성 남문 낙남루가 우람했다.

선산대로 라이딩 꼭짓점은 선산읍 이문리 78에 있는 김재규 장군의 집이다. 흔치 않은 방문이고 어떻게 보면 금기에 도전하는 당돌발칙한 도전 같아 짜릿한 자전거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하진 않았다. 역시나 자신이 모셨던 대통령을 저격한 암살범으로 생을 마쳐서 그런지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 안내판이 여기에 서 있는 것과 대비됐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내비게이션을 켰다. 내비게이션은 선산서로의 이문삼거리를 거쳐 빙빙 돌아 서당공원으로 데려다주었다. 지름길이 있다는 걸 알고는 얼차려 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서당공원은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는 조선 인재향 ‘장원방’의 유래와 인물들을 새긴 유적지였다. 서당공원 바로 뒤에 있는 한옥이 김재규 장군 생가로 알려진 본적지였다. 집은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높은 담장을 쌓아 외부의 시선을 극도로 배제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의 집을 세 바퀴 돌았다. 그와 관련된 흔적은 이문리 마을회관 지명비에서 발견되었다. 부친(김형철)이 향토발전과 육영사업을 위하여 평생을 노력했고, 이문리 83-2를 기부하여 마을회관을 이전 신축하도록 베풀었다는 것이다.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출판을 비롯해 사회 일각에선 김재규 재평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재야운동의 대부인 함세웅 신부는 “5천만 민중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몸을 던져 거사를 치렀지만 이러한 내용이 지금 시대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변론했던 강신옥 변호사는 “역적으로 몰린 조선시대 사육신도 재평가받고 인정받는 데 250년이 걸렸다”면서 “언제라도 10·26 거사 정신이 제대로 밝혀지고 평가받을 날이 올 것”이라 확언했다.

김재규는 안중근 의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인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과 같은 10월26일 유신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런 이유로 일부에서는 안중근 의사와 같은 호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70년간 한 마을에서 12인이 과거에 등제하여 장원방이라 불린 선산이 배출한 위인들로는 길재를 시작으로 ‘농사직설’을 쓴 정초, 사육신 하위지, 영남학파 형성의 줄기가 된 김숙자와 그의 아들로 영남학파의 거두가 된 김종직 등이 있다. 선산은 생육신과 사육신을 배출한 절의지향(節義之鄕)으로 빛난다. 그 동기야 속속들이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그는 유신체제 종식을 바랐던 가장 문민적인 중앙정보부장으로 평가받을 것으로 예상해 본다.

자전거를 타고 달려본 선산대로는 1회용 라이딩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대구·경북 역사의 X파일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역사적 부활과 대한민국의 미래가 실타래처럼 꼬여있다는 생각을 하며, 영남사림 정신의 발원지인 길재 선생의 봉한리를 찾아나섰다(길재 선생의 봉한리에서 여헌 장현광의 동락공원, 모원당 편은 선산대로 라이딩2에서 이어달리겠습니다).

인물 갤러리 ‘이끔빛’ 대표 newspd@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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