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혁의 남자의 취미] 와인으로 갈아탈 시간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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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0   |  발행일 2017-02-10 제40면   |  수정 2017-02-10
마흔, 술잔치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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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과의 회식도 와인을 마시며 대화하는 분위기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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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반주로 곁들이는 와인. 와인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당신 앞에 갑자기 도깨비가 나타나서 한 가지 질문을 한다. 답을 내지 못하면 당신을 저승으로 데려간다고 겁을 준다. 물론, 도깨비는 공유를 전혀 닮지 않았다. 자, 질문이다. 인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것은 무엇일까? 머릿속에 여러 가지가 떠오를 것이다. 바퀴벌레, 종교, 불, 보석 등등. 만일 필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것이다. 술이라고.

짐작하셨듯이 나는 애주가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술 마시기 좋았다. 좋은 안주가 있어도 한 잔 생각나고, 안주가 변변치 않은 날에는 번데기 탕으로도 충분했다. 당나라 시인 이백처럼 석 잔에 대도에 통하고, 한 말에 자연과 합치하는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달빛 아래에서 홀로 술깨나 마셨던 사람이다.

소문난 애주가이기에 나름의 철칙도 있었다.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장소와 시간을 따지지 않는다. 간의 회복을 위해 가급적 이틀 연속은 피한다. 그렇게 20년이 넘는 세월을 술과 함께 풍류를 즐기며 살아왔다. 그동안 술로 인해 발생한 사건 사고를 정리하면 자서전 한권 분량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불혹의 나이, 마흔. 술잔치는 끝났다.

남자의 취미. 오늘의 주제는 술, 그중에서도 와인이다. 주종을 가리지 않는다더니 뜬금없이 와인이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살아남기 위해서다. 술에 반쯤 담그고 살던 젊은 날이 지나고 나니 몸 곳곳에서 적신호가 감지된다. 복부 비만부터 만성 피로감까지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 해 뜰 때까지를 외치던 호기로움은 1차에서 정신 줄을 놓는 부끄러움으로 둔갑했다. 다음날 오후가 되어도 가시지 않는 숙취는 혹사당한 간에 의한 복수의 서막이다.


酒種·장소·시간 불문 20여년 애주인생
몸의 적신호에 ‘생존’위한 타협과 조율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절충점 와인세계


자기 취향에 맞는 선택의 즐거움에다
좋은 사람들과 오래 마시며 대화까지
건전한 음주 문화 당신도 맛보게 되길



대한민국 40대 남성의 사망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가 20대의 술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라면 지나친 억지일까? 그렇다. 신체는 이미 변곡점 아래로 향하고 있는데, 기분은 마냥 청춘의 꽃길을 걷고 싶어 하는 중대한 착각이 수명을 앞당기는 거다. 이렇게 마시다가는 병풍 뒤에서 향냄새 맡겠다는 위기감이 느껴질 때, 우리에게 필요한 단어는 바로 절제와 변화다.

물론, 금주하면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느냐고 코웃음 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애주가에게 금주란 영혼 없는 삶이며, 가시밭길 위를 걷는 맨발의 인생이다. 엔진을 빼앗긴 자동차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듯, 애주가의 원동력은 한 잔 술이 아니던가? 타협과 조율이 필요했다. 건강을 지키면서 적당히 촉촉한 윤기가 흐르는 삶을 위해. 그리고 마침내 와인이라는 절충점을 찾았다.

한때 와인은 쳐다보지도 않던 시절이 있었다. 한입에 털어 넣는 성취감도 없고, 마셔도 잘 취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규칙은 그렇게 까다로운지. 고상한 취미인 양 와인을 홀짝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솔직히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와인 한잔 하자는 제안에 무슨 소리냐며 곱창에 소주를 관철시키던 그때, 나는 교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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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관련 서적들. 두세 권이면 와인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지인의 소개로 와인을 다시 접했다. 몸 생각하면서 마셔야 하지 않겠냐는 한 마디가 이번에는 무게감 있게 다가왔다. 좋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마시면서 대화 나누는 데 와인은 제격이었다. 모든 체액이 알코올로 바뀌면서 기억이 사라지던 상실감에서 마침내 해방되는 느낌. 와인은 상한 간을 부여잡고 고민하던 내게 구세주처럼 다가왔다.

필자의 글에서 와인에 대한 강의를 기대하는 분은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럴 능력도 생각도 없다. 아직은 누군가 추천해주는 와인이나 마트에서 저렴한 와인을 구입해 마시는 수준이므로. 그저 나처럼 앞날을 걱정하는 누군가에게 와인으로 갈아탄 후의 소감 내지 마음의 자세를 전하고 싶을 뿐이다. 술을 사랑하는 당신 앞에 새롭게 등장한 선택지인 와인에 대한 진심 어린 조언이랄까.

와인의 매력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과실주계의 선배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자. 아무것도 모르면서 비싼 와인을 마시는 것보다, 와인을 어느 정도 공부한 후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적정 수준의 와인을 찾아 마시는 것이 훨씬 현명하고 품격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쥐뿔도 모르면서 빈티지 운운하는 것은 빈티 나는 일임을 명심하자.

와인의 좋은 점, 첫째는 천천히 마시니 빨리 취하지 않는다. 우리의 술 문화 중 악습관의 하나가 원샷 하고 머리에 털기 아니던가. 이술 저술 말아서 휘휘 저어 한입에 들이붓고, 그렇게 몇 순배 돌고는 정신없이 취하던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은 분들이여, 와인 잔을 들지어다. 와인은 눈으로, 코로, 입으로 조금씩 느끼며 마시는 술이다. 취했다 깨기를 반복하는 신세계를 경험해 보시라.

둘째로, 와인은 적당량을 마실 수 있다. 소주처럼 두세 병씩 마시기에는 일단 경제적 부담도 있고, 산성을 띠기 때문에 많이 마시면 위산의 역류를 느낀다. 알코올 함량 10도 수준이면 한 병으로 둘이 나누어 마시기 적당하다. 아이들 재우고 아내와 나누어 마시는 와인 한 병은 행복감의 절정이다. 소주의 빈병 수를 헤아리며 뿌듯해하던 그 시절의 객기를 하루빨리 접도록 하자.

셋째, 느긋하게 마시며 대화하기에 적당하다. 옆 사람 빈잔 신경 쓰랴, 부딪친 잔 한번에 털어 넣으랴, 다시 잔 채우랴, 안주 먹을 시간도 없는 속도전 뒤에 남는 것은 사라진 기억뿐이다. 거기다 주변에 한둘쯤 반드시 존재하는, 술 취하면 했던 이야기 무한 반복하는 이와 마주 앉는 날은 악몽에 가깝다. 이제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가끔 목을 축이는 건전한 음주의 세상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와인은 공부를 하며 마시는 술이다. 포도의 품종에서부터 지역별 와인의 특성까지 아는 만큼 선택의 폭이 다양해진다. 대형마트에 진열된 수백 가지의 와인 중에 가격이 아닌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당당하게 고르는 자신을 상상해 보라. 술을 마시기 위해 지적 투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필자는 와인 예찬론자는 아니다. 서두에 밝혔듯이 주종을 가리지 않는 애주가다. 지난 20여년간 각양각색의 술을 마셔보았지만, 좋은 술도 있었고, 나쁜 술도 있었다. 와인은 천천히 대화하며 마시고, 과하게 취하지 않으며, 다음날도 비교적 숙취가 덜한 좋은 술에 속한다. 어떤 술도 마시는 습관이 올바르지 못하면 독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오늘 저녁, 좋은 이들과 와인 한잔씩 나누는 건 어떨까? 물론 술값은 더치페이로 말이다.

칼럼니스트 junghyuk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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