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禽獸會議錄 (금수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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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04   |  발행일 2017-02-04 제23면   |  수정 2017-02-04
[토요단상] 禽獸會議錄 (금수회의록)
홍억선 한국수필문학관장

이 나라가 기울어져 서구 열강으로부터 온갖 농락을 당하고, 기어이 바다 건너 왜족에게 통째로 잡아먹힐 무렵, 안국선이라는 자가 ‘금수회의록’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이 희한한 소설에는 여덟 종류의 짐승이 나오는데 그들의 입으로 차례차례 퍼부어 대는 인간 세태가 가관이었다.

1석(席)은 반포지효(反哺之孝)의 까마귀가 내뱉는 꾸지람이다. 인간들의 말을 들어보면 낱낱이 효자 같되, 행실을 보면 제 한 몸뿐이다. 부모가 굶주리되 돌아보지 아니하고, 머리에 조금이라도 든 자는 부모 보기를 쓸모없는 물건같이 대접하니 어찌 효가 있다 하겠는가.

2석은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여우다. 요망하고 간사한 것이 여우라 하였으나 제 나라가 망하든지 제 동포가 죽든지 외세에 의탁하여 벼슬자리를 얻으려 하는 역적 놈도 인간이며,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해롭게 하여 나랏일을 결딴내는 소인 놈도 인간이다.

3석은 정와어해(井蛙語海)의 개구리다. 나라는 다 망하여 가건만 천하대세를 살피는 자는 드물고, 제 나라도 알지 못하면서 보도 못한 다른 나라 일을 떠벌리며 추적대는 것 또한 인간이다.

4석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의 벌이다. 사람의 입은 변화무쌍하여 마주 대하였을 때는 꿀을 들이붓는 것처럼 달게 말하다가 돌아서면 악담질이다. 좋게 지낼 때는 깨소금 항아리 같다가 여차하여 틀어지면 죽기 살기로 몰아붙이니 그런 악독한 짓도 다 인간에게서 나온다.

5석은 무장공자(無腸公子)라는 게의 반격이다. 썩고 흐리고 더러운 것이 인간의 창자다. 속에 똥밖에 없으니 옳은 마음으로 벼슬하는 자가 누구누구인가? 백성 잡아먹을 생각, 나라 팔아먹을 생각밖에 없으니 인간에게 어찌 창자가 있다 하겠는가.

6석은 영영지극(營營之極)의 파리다. 임금을 속인 것이 비단 환관 조고(趙高)뿐이요,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한 자가 어디 조조(曹操)뿐이었겠는가. 친구라고 사귀다가 저 잘되면 차버리고, 동지라고 상종타가 저 잘되고자 남 죽이고 유지지사(有志之士) 고발하여 감옥에 몰아넣는 것이 인간의 세태 아니던가.

7석은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의 호랑이다. 대낮에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으며, 죄 없는 백성을 감옥에 몰아넣어 돈 바치면 내어 놓고, 돈을 받아 벼슬 얻어 그 밑천을 뽑으려고 음흉한 수단으로 백성을 못 견디게 하니, 그리하여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다 하였다.

8석은 쌍거쌍래(雙去雙來)의 원앙이다. 남녀 불문하고 두 사람을 섬기는 것은 옳은 법도가 아니거늘, 길가의 한 가지 버들을 꺾기 위하여 처를 버리고, 남편이 병들어 누웠는데도 외간을 드나든다. 상부한 지 며칠이 못 되어 개가할 길 찾아다니고, 자식을 낳아서 다리 밑에 내버리는 것이 괴악한 인간의 짓거리다.

오늘 다시 이 짐승들의 회의록을 찬찬히 읽다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아난다. 어찌하여 지금의 나라 꼴이며 인간세태가 백 년 전에 하는 짓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가. 더욱이 작금에 괴이한 짐승들이 출현하여 패를 갈라 눈앞을 가리니 그것이 두렵다. 지금 한쪽에서는 뱃가죽에 기름이 잔뜩 낀 돼지들이 씩씩거리고 있고, 또 한쪽에는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굶주린 이리들이 퀭한 눈을 반짝이며 노려보고 있다.

잡식성인 돼지들은 오로지 저 먹을 것에만 골몰하는 탐욕의 짐승이다. 거만하게 똥배를 앞세우고 거들먹거리다가 오로지 먹이 앞에서만 고개를 처박는 추잡한 짐승이다.

이리는 배가 고파도 아무거나 함부로 먹지 않는다. 참고 참았다가 먹잇감을 찾았다 하면 그 사냥법이 치밀하다. 몇 날 며칠이고 아니 몇 달이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한 번에 목을 따고 허벅지를 물고는 날카로운 이빨을 거두는 법이 없다. 언제 다시 배부를 날을 기약할 수 없기에 먹었다 하면 아주 거하게 배를 채운다. 심지어 1년 만에 10년 치를 먹어 치울 수도 있다.

이런 짐승들에 눌려 살아가는 우리가 슬프고 가련하다.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또 무엇을 내주어야 할까. 저들의 배를 위해 서슴없이 나라를 팔아먹는 꼴도 보았으니 말이다.
홍억선 한국수필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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