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봉합이 아니라 규명이다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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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02   |  발행일 2017-02-02 제31면   |  수정 2017-02-02
[영남타워] 봉합이 아니라 규명이다

1980년대 중반 대학 새내기 시절, 내 의식의 대전환점이 된 것은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발행·이하 해전사)을 읽고 난 뒤부터였다. 내게 해전사는 가히 ‘유레카’급이었다. 반공(反共) 기반의 체제수호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공교육만을 받아온 까닭이었으리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와해된 배경과 과정을 해전사를 통해 처음 알게 됐었다. 그 안타까움과 절망감은 오랫동안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고(故) 노무현 전(前) 대통령은 재임 시절 “반민특위가 해체된 일은 가슴속에 불이 나고 피가 거꾸로 도는 일”이라고 했다. 잘못된 역사의 청산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의 소회였으리라.

해전사와 노 전 대통령의 언급이 주는 교훈은 ‘역사의 불완전한 봉합(封合)은 독(毒)’이라는 것. 우리의 현대사는 무수한 변곡점마다 ‘청산과 규명’에 지극히 인색했다. 어정쩡한 봉합에 급급해 상식과 원칙, 진실이 묻혀버린 일들이 현대사에서 수도 없이 많았다. 대통합·대화해·대양보의 미명 아래….

작금 비선실세의 국정농단도 봉합의 역사가 낳은 작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대통령 탄핵정국은 지긋지긋한 ‘봉합’과 이별하고 ‘진실’을 맞이할 수 있는 천금의 기회인 것이다.

같은 시각으로 지역의 ‘경북대’를 바라봤다. 아직 풀리지 않은 ‘총장 임용, 1순위 후보 배척’에 대한 진실. 새 총장 체제에서도 대학은 논란 중이다. 정부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국립대 총장 1순위 후보자들은 청와대 전(前) 실세들을 특검에 고발했다. 권력에 의한 국립대 총장 임용농단의 실체를 밝히기 위함이다. 경북대 김사열 교수는 1순위임에도 총장에 임용되지 못했다. 2년여 동안 임용제청을 거부당한 뒤의 결과였다. 그는 최근 방송 인터뷰에서 “한때 동료 교수를 통해 ‘총장이 되려면 반성문격의 각서를 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너무나 아니라고 판단돼 응하지 않았다”면서 “정부는 총장 임용제청 거부(2014년 12월) 사유에 이어 1순위 후보 배척(2016년 10월) 사유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총장 임용농단은 대통령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진실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 상황이다. 정부 부처 일각에선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증언들을 하고 있다. “민정수석이 확보한 후보자의 정치성향과 과거 이력에 대한 검증내용을 토대로 판단했다” “민정수석이 ‘결격’을 강력하게 주장하면 회의 전체가 영향을 받았다”…. 우병우 전 수석을 지목한 증언들이다.

이제 1순위 후보 배척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규명은 특검의 몫이 됐다. 총장임용 문제를 끝까지 파행으로 몰고 온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우선 교육부가 끝까지 제출을 거부한 교육공무원인사위원회의 회의록이 공개돼야 한다. 과거 교육부는 이 인사위원회의 심의를 통해 임용제청을 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아울러 문화계의 블랙리스트와 같은 교육계의 ‘리스트’가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국립대 총장 임용농단은 모름지기 청와대 실세의 지시에서 비롯됐겠지만, 교육부도 충실한 부역업무를 했기에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교육부는 이제라도 도의심을 갖고 진실규명을 위한 증언에 적극 나서야 한다.

경북대는 총장 임용농단의 엄연한 ‘피해자’다. 공정하고 적법하게 후보자를 선출해놓고도 오랜 기간 총장 공석을 겪었다. 정권의 독선과 오판이 낸 생채기였다. 1순위 후보 배척에 대한 진실 규명은 정권에 의해 대학의 자율성이 훼손된 경북대를 다시 보듬고 일으켜 세우는 일이라는 점에서 실로 중차대하다. 그렇기에 피해자인 경북대 구성원 스스로도 ‘봉합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창호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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