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여성들의 행진(Women’s March), 역사를 바꾸나

  • 이영란
  • |
  • 입력 2017-01-31   |  발행일 2017-01-31 제30면   |  수정 2017-01-31
20170131

박 대통령이 여성이지만
그가 중도하차하더라도
전체여성 허물 돼선 곤란
여성 리더십은 계속되고
사회는 그걸 가능케 해야


지난 21일 미국의 제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취임 직후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를 중심으로 런던, 나이로비, 멜버른, 서울과 남극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7개 대륙의 700여 곳에서 주최 측 추산 500만여명이 참여한 행진은 분명 반(反)트럼프 시위였다. 지난해 11월8일 힐러리 클린턴의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하와이의 은퇴 여성변호사인 테레사 슉이 선거 다음날인 9일 페이스북에 ‘트럼프 취임식 뒤 워싱턴 행진’을 제안하는 페이지를 만든 것이 계기다.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으로 여성은 물론 인종·종교·환경·평등·건강·성정체성 등 다양한 기본권이 후퇴될 위기에 놓였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트럼프 행정부에 다양한 기본권의 보장을 촉구하기 위한 다중적 구호의 시위였다. 그런데도 여기에 붙여진 이름은 ‘여성들의 행진(Women's March)’이었다. ‘여성’이란 구호가 이 모든 이슈들의 대표가 될 수 있다는 것, ‘여성’이 그 많은 기본권을 향한 외침의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행진’에는 마돈나, 줄리안 무어, 스칼렛 요한슨, 마크 러팔로, 크리스틴 스튜어트, 엠마 왓슨, 나탈리 포트만 등 스타들도 앞장섰다. 마돈나는 스스로 이 행진을 ‘혁명의 시작’이라고 부르면서 “두려워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평등권을 위한 주장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2월 출산을 앞둔 만삭인 나탈리 포트만은 “여성으로서 우리는 주체적인 리더가 돼야 한다. 여성의 권리와 약자의 보호를 위해 연대해야 한다”는 힘찬 연설을 펼쳐 박수를 받았다.

이날 한국에서는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시민 2천여명(주최측 추산)이 모였다. 이곳은 지난해 5월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이후 피해 여성을 추모하고 여성 혐오에 저항하는 내용이 담긴 포스트잇 수만장이 붙었던 상징적인 공간이다. 시민들은 여성인권 보장과 여성 혐오 철폐를 촉구하며 강남 일대를 걸으며 ‘서울 여성행진’을 진행했다. 이들은 “여권이 인권이고 인권이 여권이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등의 구호를 외쳤고, 행진을 마친 뒤에는 다시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여 벽에 포스트잇 200여장을 붙였다. ‘여성의 몸은 공공재가 아니다’ ‘우리 딸들에게 안전한 세계를’ 등의 내용이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고 눈도 내렸지만 주최 측 예상을 웃도는 인원이 참가했다. 남성과 외국인 참가자도 상당수 보였다. 행진을 주최한 세계여성공동행진 기획단은 포스트잇 내용을 온라인상에 기록으로 남길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계 여성이 한목소리로 여성의 기본권 보장을 외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 주도로 박근혜 대통령이 나체로 표현된 ‘더러운 잠’ 작품이 전시됐다. 국회의원 시절 박근혜를 반라(半裸)의 여배우로 희롱한 패러디 사건이 있었는데, ‘최순실 게이트’를 빙자해 이번엔 수위가 한 걸음 더 나갔다. 여성 혐오적인 의도로, 어쨌든 현직 대통령인 여성을 발가벗겨 제작한 작품을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공공장소에 전시한 것은 ‘박근혜’라는 개인에 대한 잔인한 인격 살인이며 저질적 성희롱이다. 지금까지 남성 권력자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성적 대상화나 혐오적 형태로 표현된 적이 있었던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박 대통령은 여성이지만 그의 잘못이 다른 여성들의 허물이 돼서도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조직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우리 사회는 이 땅의 여성 지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를 바란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그가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지도력을 발휘함으로써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앞으로 박 대통령이 실패한 대통령으로 중도하차 하더라도 여전히 여성들은 리더십을 발휘하고 사회는 그것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이번 사태로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퇴보해서는 안 된다. 이영란 서울취재본부 부국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