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지역사가 국사다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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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26   |  발행일 2017-01-26 제31면   |  수정 2017-01-26
[영남타워] 지역사가 국사다

“배고파서 못 살겠다.”

1946년 10월 미군정(美軍政)의 식량정책 실패로 아사자가 속출하자 대구시민들이 광장에서 미군정을 향해 외친 함성이다. 전국 73개 시·군으로 확산된 이 ‘기아 데모’는 대구에서 촉발된 이른바 ‘10월사건’이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폭동’ 또는 ‘소요’로 규정하고 계엄령을 내려 강제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민이 피를 흘렸으며 그 상처는 지금도 유가족에게 이어지고 있다.

쌀값 폭등, 콜레라 창궐 등 미군정의 정책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정점에 이른 가운데 벌어진 이 사건을 국정역사교과서는 ‘조선공산당 무력투쟁’ 사건으로 색깔을 입혀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다.

10여년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미 10월사건의 역사적 실체를 밝혔다. 지난해엔 대구시도 이에 부응해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까지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대구시가 2013년부터 매년 10월항쟁유족회가 주최하는 추모제에 조화를 보내거나 관련 공무원을 참석시키는 것도 10월사건을 명예 회복하려는 의지의 발로다.

국정역사교과서가 역사적 진실을 축소하거나 왜곡시킨 대구·경북의 근현대사는 이것뿐만 아니다. 대구 정신의 2대 자랑인 ‘국채보상운동’과 ‘2·28민주운동’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칼질을 했다.

국채보상운동이 나라의 빚을 갚아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자는 의지에서 시작되었음에도 목적은 온데간데없이 담배를 끊자는 김광제·서상돈의 금연운동에서 촉발됐다고 나와 있다. 금연운동은 수단일 뿐인데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게다가 몇몇 검정교과서엔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한 페이지를 할애한 경우도 있으나 국정역사교과서는 분량도 절반으로 줄이고 주요 인물의 사진도 누락시켰다.

국정역사교과서에는 또 대구지역 고교생이 주도한 2·28민주운동도 단 한 줄로밖에 언급하지 않았다.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들은 57년 전 민주주의 수호정신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면 국가기념일 주장과 더불어 국정역사교과서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성명서라도 발표해야 할 것이다. 국정역사교과서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을 축소시켰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음에도 침묵하는 건 옳지 않다.

국정역사교과서가 보수정권 연장을 위한 청와대와 극소수 정치집단의 음모와 꼼수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국·검정 혼용에 반대하지 않는 바른정당의 행위도 바르지 않다. 정당이란 게 이념과 사상, 역사인식을 공유한 사람끼리 모인 정치집단인데 그러려고 새누리당을 뛰쳐나온 건 아니잖는가.

국사는 지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다. 또한 개인사, 가족사, 민족사, 세계사와도 씨줄·날줄로 연결돼 있다. 지역사를 이렇게 왜곡·축소시키고 있음에도 대구·경북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수장의 역사 인식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전국의 교육감들이 한목소리로 국정역사교과서를 거부하겠다고 밝혔음에도 국정역사교과서를 폐기하지 않은 채 국·검정 혼용을 하겠다고 선언한 배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한술 더 떠 이영우 경북도교육감은 ‘국정교과서 지킴이’가 되겠다고 선언했단다. 이 교육감은 진정 경북이 ‘역사교과서의 섬’으로 고립되길 원하는가. 대한민국을 열어갈 미래 역사의 주인공은 교육감이 아니고 학생이다. 전국의 역사전공 학자와 교사 90% 이상이 국정역사교과서 폐기가 바람직하다고 했고 국정역사교과서 집필진도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아닌 것이 드러난 상황이 아닌가.

샛강과 실개천이 합해져 강을 이루듯 지역사가 모여 국사가 된다. 그 흐름 속에 지역사는 곧 국사다.

10월항쟁을 조선공산당 무력투쟁으로 몰아간 이들이 2016~2017 촛불집회에 등장한 “이게 나라냐”란 구호를 ‘반란’과 ‘폭동’으로 몰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끔찍하다.

박진관 (기획취재부장·사람&뉴스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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