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진의 정치풍경] 할배와 손녀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7-01-23   |  발행일 2017-01-23 제30면   |  수정 2017-05-17
20170123

지난 토요일에도 광화문에서는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가 어김없이 열렸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바로 옆자리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습니다. 동아일보사와 동화면세점을 가로지르는 길을 경찰이 삼팔선 가르듯 벽을 치고 있어서 집회 중에 충돌은 없지만 집회장을 오고 가는 길에서는 얘기가 다릅니다. 태극기를 든 어른들과 빨간 피켓을 든 학생들이 마주치고 뒤섞이는데 이때 묘한 긴장감이 흐르곤 합니다.

어제(21일) 저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듯한 소녀와 해병 복장의 할아버지가 스치듯 지나치며 서로에게 뭔가를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소녀에게 털목도리를 내밀며 “날도 추운데 빨랑 들어가라” 하고 한마디 던집니다. 소녀는 할아버지에게 털장갑을 건네며 “응” 하는 대답과 함께 광화문 방향으로 재빨리 올라갔습니다. 한 가족인 듯싶습니다.

어렸을 때 삼촌한테 들은 베트남전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형은 정부군, 동생은 베트콩으로 갈라져 서로 총부리를 겨누지만 집안에서는 다투지도 않는답니다. 양 진영으로 나뉜 것도 생각이 달라서가 아니라 낮에는 정부군이, 밤에는 베트콩이 마을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가족을 살리기 위한 역할분담이었답니다.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한 집안의 할아버지와 손자, 손녀입니다. 그러나 집회장에서 울려 퍼지는 구호를 들으면 화해가 불가능해 보입니다. 제가 목격했던 할배와 손녀도 집에 가면 격렬하게 싸우다가 서로 얼굴도 안 볼 듯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헌재가 판결을 내리면 이 혼돈의 상황이 정리될 것으로 기대하지만 어렵습니다. 여기서 멈추기에는 탄핵 찬성파나 반대파나 너무 인원이 많고 너무 단단하게 조직되어 있습니다. 헌재의 판결이 발표되는 순간 광화문광장은 판결불복 집단의 분노를 쏟아내는 장이 될 것이고, 이어서 치러지는 대통령선거도 탄핵의 후유증을 심각하게 앓을 것입니다. 선거가 ‘탄핵계승 대 탄핵무효’라는 퇴행적인 이슈하에 전개될 것입니다. 누가 이기건 그 결과도 뻔합니다. 국정의 주요이슈가 과거사 파헤치기로 점철될 것입니다.

누군가 이 저주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양쪽 모두에게 “이제 그만!”을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어느 한 편의 눈치만 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오로지 단 한 명의 위인만이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을 듯싶습니다. ‘망각’의 위인. <시사만평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