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배려의 마음’ 까치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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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23 07:52  |  수정 2017-01-23 07:52  |  발행일 2017-01-23 제16면
[밥상과 책상사이] ‘배려의 마음’ 까치밥

3년 전 조그마한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팔순의 형님께서 막내 동생의 입택을 축하하며 마당 한 구석에 대봉 감나무 한 그루를 심어주셨다. 첫해에 감꽃이 피고 감이 몇 개 열렸지만, 줄기와 가지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열매를 미리 땄다. 지난해에는 딱 두 개가 열렸는데,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 굵게 잘 영글었다. 서리가 내릴 무렵 아내와 나는 첫 수확물을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새들에게 주기로 하고 감을 따지 않았다. 빨간 홍시는 겨울 하늘이 얼지 않게 해주는 지상의 불씨 같은 느낌을 주며 마음을 푸근하고 풍요롭게 해주었다. 12월 말까지 감들은 온전하게 달려 있었다.

1월로 접어들자 곤줄박이, 박새 같은 새들이 와서 홍시를 먹기 시작했다. 유심히 관찰해보니 한 마리가 오래 홍시를 먹는 일이 없었다. 한 녀석이 조금 먹고 날아가면 다른 녀석이 와서 먹고는 또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려고 하다가도 녀석들이 홍시를 먹고 있으면 놀라서 날아갈까봐 잠시 기다려 주곤 했다. 보름쯤 지나자 새들은 꼭지만 남기고 알뜰하게 다 먹었다. 지금이 먹이 구하기가 가장 힘든 시기일 것 같아 우리는 여름에 먹으려고 냉동시켜 둔 홍시 몇 개를 꺼내어 감나무 가지 위에 얹어 두기로 했다.

한국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졌던 미국의 소설가 펄 벅 여사가 1960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고(故) 이규태 선생과 대구, 경주, 부산 등을 방문한 적이 있다. 경주 여행 중 차창 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감나무 끝에 감이 10여 개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따기 힘들어 그냥 두는 건가?”라고 물었다. 이규태 선생이 “까치밥이라 해서 겨울새들을 위해 남겨둔 것”이라고 답하자, 그녀는 “바로 이것이야. 내가 조선에 와서 보고자 했던 것은 고적이나 왕릉이 아니었어요. 이것 하나만으로 나는 한국에 잘 왔다고 생각해요”라고 답했다.

시골길을 달려가던 펄 벅이 지게에 볏단을 짊어진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종일 일한 소도 힘들 것이라 생각하여 농부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녀는 미국 같으면 지게와 볏단 모두를 달구지에 싣고 농부 자신도 거기 올라타고 갈 것이라고 말하면서, 짐승에게 베푸는 ‘배려의 마음’에 감탄했다. 그녀는 1963년에 발표한 소설 ‘살아있는 갈대’ 첫머리에서 ‘한국은 고상한 국민이 살고 있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썼다.

빈 병 값이 오르면서 폐지와 병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들의 삶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빈 병을 좀 양보하면 좋겠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 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라고 시인 김남주는 노래했다. 설날이 다가오지만 음력 섣달 끝자락이 그 어느 해보다 쓸쓸하고 황량하다. 탄식과 분노, 냉소와 무관심이 범람하는 저 광장과 거리에서 어둡고 후미진 노인들의 쪽방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마음’이 강물처럼 넘쳐흐르길 소망해 본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 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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