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열의 우리문화 겹쳐보기] 진성여왕과 박근혜 대통령의 문화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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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20   |  발행일 2017-01-20 제22면   |  수정 2017-01-20
20170120
시인·경북대 명예교수

젊은 피아니스트와 소설가
세계 감동시키고 돌아와도
교감과 감동을 나누기보다
머리손질이 우선인 통치자
문화융성 운운은 어불성설


우리 역사에서 진성여왕이라면 황음무도하여 결국 나라를 팔아먹은 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 여왕과 박근혜 대통령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박 대통령에게 모욕이 된다고 ‘박사모’들이 태극기를 흔들어댈지 모른다.

진성여왕에 대한 사료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최치원의 글 등에 들어 있으며 여왕의 황음(荒淫)을 이야기한 사람은 김부식뿐이다. 최치원의 글을 읽으면 그녀는 “빼어난 곤덕(坤德)을 본받고 아름다운 천륜을 계승하였다. 이는 참으로 신주(神珠)를 품었다고 하는 것이요 … 전하는 부족한 곳이 있으면 모두 보완하였고 선(善)이라면 닦지 않음이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그렇게 아름답고 착한 왕이 있을 수 없다. 최치원이 매문(賣文)을 했을 리 없다.

그러나 측근에 의해 국정이 농락당하고 급기야는 실정을 하여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고 위의 자료에서 언급한다. 여왕은 양위를 해야 했고, 박 대통령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니 그것이 하나의 공통점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여왕이나 박 대통령이나 ‘문화융성’을 중요한 국정과제로 삼았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진성여왕 2년(888) 조를 보면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왕명에 따라 향가(鄕歌)를 수집하여 ‘삼대목(三代目)’이란 책을 엮었다고 나와 있다. 조금만 살을 붙여보자.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첫해에는 대부분의 왕들처럼 죄수들을 사면하고, 1년간 세금을 면제하고, 황룡사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여느라 어영부영 보냈을 것이다. 그 이듬해 평소 마음에 품고 있던 사업을 범국가적 프로젝트로 벌였으니 그것은 당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있던 향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어 보존하는 일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팀장이 앞에서 말한 두 사람이었다.

이 팀장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위홍은 여왕의 큰 오라버니 헌강왕이 즉위했을 때 상대등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정치적 실력자이면서 여왕의 친삼촌이고, 또 상당한 멋쟁이에다 인기도 높았을 것이다. 여왕의 아버지인 경문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당황제로부터 그를 신라왕으로 인정하는 조명(詔命)이 내려오자 그것을 축하하는 행사를 크게 벌였는데 그중 한 행사로 왕릉에 제사를 올리는 일을 위홍이 맡아서 했다. 그의 행렬이 “들판과 시내를 화려하게 비추며 지나가자 구경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복어처럼 등에 거뭇거뭇하게 점이 찍힌 노인과 고니처럼 눈썹이 하얀 승려가 손뼉을 치며 서로 기뻐하고 크게 경하”했다고 한다. 치제(致祭) 자체보다는 위홍의 행렬이나 아니면 직접 그를 보고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니 그가 얼마나 인기 있었겠는가. 이 생생한 기록도 역시 최치원이 했다.

대구화상도 스님으로 당대 최고의 향가 전문가이며 작곡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위홍과는 기질적으로 훌륭한 콤비가 되었으리라. 이 두 사람의 지휘 아래 시대별로, 또 지방별로 노래를 폭넓게 수집하고 편집하고 인쇄하여 일본의 ‘만엽집(萬葉集)’ 같은 것을 만들었으리라. 그 가집이 전해지기만 했다면 여왕은 천추만대에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문화융성을 하겠다고 두 재단을 벼락치기로 만들고 그 운영을 맡긴 사람은 이 시대 최고의 비선실세 최순실과 무슨 황태자라는 사람이었으며, 눈썹 짙은 차관 한 사람도 든든한 뒷배로 앉혔다. 장차 우리 시대의 어떤 ‘삼대목’을 염두에 뒀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밝혀지는 것을 보면 문화융성 재단이 아니라 근사한 복마전을 지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런 문화 프로젝트는 진성여왕처럼 문화·예술적 혜안과 포부가 있는 사람만이 추진하는 것이다. 여왕 자신이 향가를 사랑한 나머지 그것의 창달이 사명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젊은 피아니스트와 소설가가 세계를 감동시키고 돌아와도, 그들과 예술적 교감이나 감동을 나누기보다는 시간 맞춰 머리 손질부터 해야 하는 통치자가 그런 팀을 데리고 문화융성을 하겠다는 것은 “복어처럼 등에 거뭇거뭇하게 점이 찍힌 노인과 고니처럼 눈썹이 하얀 승려”가 다 웃을 일이 아니겠나. 시인·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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