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혁명의 추억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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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18   |  발행일 2017-01-18 제30면   |  수정 2017-01-18
20170118

5强에 멱살잡힌 한반도형세
한말에 못지않은 풍전등화
대권주자들 모두 안보 못봐
열강 사이 눈치외교나 하면
독립국가라고 할 수 있겠나


체 게바라. 아르헨티나 출신 의학도였던 체는 오토바이를 타고 두 차례에 걸쳐 순례에 가까운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떠난다. 그게 운명을 바꾼다. 우물 안에서 달과 별만을 봤던 낭만파 청년. 그가 비로소 우물 밖 현실을 자각한 것이다. 제국주의적 욕망이 가난한 중남미를 ‘노예의 땅’으로 추락시키는 현실에 항거한다. 체는 늘 지인에게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세상의 모순을 치료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독재자 바리스타 정권을 몰아내고 쿠바 혁명이 완성될 시점에 체는 혁명의 동지였던 피델 카스트로에게 뒤를 부탁한다면서 미련없이 쿠바를 떠난다. 1965년 4월 콩고 혁명을 위해 136명의 원정대를 꾸린다. 체가 실천한 혁명의 본질은 핍박받는 민중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궁핍을 해소하는 데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1967년 10월9일 미 CIA의 지시에 의해 총살된다. 눈을 뜬 채 담담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왼쪽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볼리비아 토벌대 군인 마리오 테란을 안심시키며 ‘겁먹지 말고 쏘라’고 말했다. 쿠바의 국부(國父)가 된 카스트로는 항상 체한테 미안해했다. 사후 체의 인기가 자기 권위를 넘볼 정도였지만 카스트로는 오히려 그걸 자연스럽게 여겼다. 둘 다 초인적 아량이었다. 지난해 카스트로도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감동적인 유언을 남긴다. 자신을 위한 일체의 호화로운 국장의식을 못 하게 한 것이다. 동상은 물론 도로변에 자기 이름조차 못 적게 했다. 그 유언 때문에 쿠바는 ‘우상화 금지법’을 제정한다.

이제 혁명은 더 이상 필요 없을까. 정유년 벽두에 두 혁명가가 생각난 건 한반도 안보정세가 너무나 다급한 까닭이었다. 추락하는 경제가 문제가 아니다. 친일·친미·친러·친청파로 사분오열된 한말 못지않은 풍전등화 국면 탓이다. 박정희가 주도했던 한강의 기적은 그 딸에 의해 ‘한강의 기절’이 돼버렸다. 1천300조원의 가계부채, 700여만명의 비정규직, 결혼까지 포기해버린 청년백수, 갑만 희망이고 을은 절망인 형국. 그래서 시민의 절망이 촛불로 쉬 옮아붙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촛불을 저주하는 태극기가 거리에서 남북처럼 대치하고 있다. 김정은은 결사항쟁식으로 핵을 들었다 놨다 한다. 한말에는 4강한테, 지금은 북한까지 가세해 5강한테 멱살 잡힌 형세다.

진정 묻고 싶다. 한반도의 주인은 누군가. 미국인가, 중국인가. 아니다. 미국도 중국도 아니다. 주인의 눈으로 사물을 보면 본질이 보인다. 눈치는 또 다른 눈치를 낳게 된다. 눈치는 불안을 조장하고 결국 열강한테 버림을 받게 된다. 주인과 주인이 만날 때 비로소 대화가 된다. 아직 우린 아니다. 세계 10위권 교역국인 한국. 중국과 미국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날까지 눈치 외교를 할 건가. 이제 촛불도 정신을 차리고 탄핵을 넘어서 진정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군지 맹렬하게 물어야 할 때다. 한반도를 자기 것으로 여기는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고도의 외교전을 벌여야 할 때다. 아무나 할 수 없기에 대권주자가 나서야 한다. 그런데 다들 꽁무니를 뺀다. 경제회생에만 몰두한다. 시장·시민한테 맡겨둬야 더 잘 굴러갈 복지, 분배, 성장 등에 승부수를 던진다. 안보는 못 보고 경제만 보려는 사람은 식민국가의 국민이다. 100년 넘게 열강이 우리의 안보주권을 독점하고 있다면 그건 우리의 자업자득이다.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남북부터 먼저 통일하고 그리하여 미국·중국·러시아·일본이 통일된 한반도를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달인외교’를 펼칠 혁명적 지도자는 누굴까.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하던 한말 상황과 거의 같다. 누가 세계 최대 화약고인 한국을 독립시킬 것인가. 둘러봐도 사면초가의 대한민국 국운에 측은지심을 느끼는 대권주자는 없는 것 같다.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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