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숙의 전통음식이야기] 貊炙(맥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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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18   |  발행일 2017-01-18 제30면   |  수정 2017-01-18
[권현숙의 전통음식이야기] 貊炙(맥적)
맥적
[권현숙의 전통음식이야기] 貊炙(맥적)
<전통음식전문가>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이 숨을 거두게 되자 우씨왕후는 이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무서운 계략을 꾸민다. 평소 대왕이 죽으면 후사가 없는 본인은 궁궐에서 쫓겨나고 연나부(왕후의 친정)의 세력이 축출될 것에 항상 불안해하였다. 그는 대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두 시동생을 찾아간다. 첫째 시동생인 발기를 밤늦게 찾아가 대왕의 뜻이라며 왕후인 자신과 혼인하여 왕이 되라 하였으나 발기는 형수를 심하게 나무라며 쫓아버렸다. 둘째 시동생 연우는 왕후가 찾아가자 소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파, 마늘, 간장 등으로 양념을 해서 숯불에 구워 왕후에게 정성껏 대접을 했다. 이것이 바로 맥적(貊炙)이다. 우왕후의 계획을 인정해준 연우는 고구려 10대 산상왕이 되었다. 우왕후와 연우는 맥적으로 부부의 연을 맺고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의 유목민들 사이에는 혈족을 중시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혼인하는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이란 풍습이 있었다.

맥적(貊炙)이란 말은 고구려 민족을 맥족이라 불렀고, 조미된 고기를 대나무 꼬챙이에 끼워 숯불에 구워 먹는다(炙)는 데서 생긴 말이다. 3세기경 중국 진나라 때 쓴 ‘수신기’에는 “맥적은 장과 마늘로 조리하여 불에 굽는다”라는 기록과 함께 “적(炙)은 이미 양념이 되어 있어 일부러 장에 찍어 먹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당시 유목민들은 주식이 육식으로 고기의 조리 방법이 나름대로 발달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로 되면서 육식을 금하게 되자 채식을 위주로 한 사찰 음식은 발달되고 고기 요리 방법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이후 몽고가 고려를 지배하게 되면서 다시 육식을 즐기게 되었는데 이때 맥적이 설야멱적(雪夜覓炙), 설야적(雪夜炙) 등으로 불리며 고기 요리가 다시 발달되기 시작했다. ‘산림경제’에는 설야멱적에 대해 “소고기를 칼등으로 두드려 연하게 한 다음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 기름과 소금을 발라 연한 불에 굽다가 찬물에 담그고 다시 굽기를 서너 차례 후 마지막에는 센 불에 구우면 고기가 연하고 맛이 좋아 눈 내리는 겨울밤 술안주로 좋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설야멱적은 너비아니로 발전되어 궁중의 대표 요리가 되었다. 1600년대 ‘음식디미방’에도 설야멱으로 기록된 점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보편화된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맥적에서 너비아니로, 또 불고기로 발전되어 왔지만 1950년대 이전의 문헌에서 불고기란 말은 찾아볼 수가 없다. 1925년 ‘해동죽지’에 개성지방에서 ‘설야멱적은 고기를 굽다가 냉수에 다시 담가 굽기를 반복하여 구우니 겨울밤 술안주로는 안성맞춤’이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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