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선명하고 쓸쓸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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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16 07:43  |  수정 2017-01-16 07:43  |  발행일 2017-01-16 제18면
[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선명하고 쓸쓸한’고요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내 쓸쓸한 날 분홍강 가에 나가/ 울었지요, 내 눈물 쪽으로 오는 눈물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사월, 푸른 풀 돋아나는 강 가에/ 고기떼 햇빛 속에 모일 때/ 나는 불렀지요, 사라진 모든 뒷모습들의/ 이름들을.// 당신은 따뜻했지요./ 한때 우리는 함께 이곳에 있었고/ 분홍강 가에 서나 앉으나 누워있을 때나/ 웃음은 웃음과 만나거나/ 눈물은 눈물끼리 모였었지요.// 지금은 바람 불고 찬 서리 내리는데/ 분홍강 먼 곳을 떨어져 흐르고/ 내 창 가에서 떨며 회색으로 저물 때/ 우리들 모든 모닥불과 하나님들은/ 다 어디 갔나요?/ 천의 강물 소리 일깨워/ 분홍강 그 위에 겹쳐 흐르던.’ (이하석 ‘분홍강’)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 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칠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쇠 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이하석, ‘투명한 속’)

‘그는 어떠한 소식도/ 잘 지워버린다./ 가령 신문지 같은 걸/ 검은색으로/ 덮거나/ 묻어버리는 게/ 아니라/ 아예 죽죽 그어서/ 새카맣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지우는 것만이 자신의 권력이고/ 욕망이며/ 이데올로기라는 듯이.// …’ (이하석 ‘최병소처럼, 지우기’ 일부)

이하석 시인의 글을 읽으면 저는 늘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를 떠올립니다. 동시에 한겨울 쇠붙이를 만질 때 살갗에 들러붙는 듯한 냉기도 느낀답니다.

피겨선수 김연아, 발레리나 강수진을 강철요정, 강철나비로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랄까요. 글쓰기를 용광로에서 시뻘겋게 달궈진 철광석을 맷질과 담금질을 거듭하여 강철로 제련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토록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작업이라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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