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시간을 이기는 미약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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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02 08:35  |  수정 2017-01-02 08:35  |  발행일 2017-01-02 제27면
[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시간을 이기는 미약한 힘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온천 간다. 아흔을 바라보는 아버지, 네 해 아래의 어머니, 두 살 터울로 여든 지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는 왕고모 둘, 거기다 만만찮은 내 나이도 보태니 합이 삼백아흔셋.// 십사만삼천사백사십오일, 삼백사십사만이천육백팔십시간이 씹고, 뜯고, 맛보고, 삭힌 가죽부대는 온통 주름투성이다.// 무게란 물질이 물리적인 힘에 의해 수용되어지는 것만큼의 양인데.// 왜 이리 가벼운가. 켜켜이 어깨에 내려앉던 그 많은 세월의 무게 다 어디에 두고 하얗게 바스러져가는 누에고치처럼 빈속 쓰다듬으며, 쿨렁이는 바퀴 위에서 저리 쉽게 흔들리는가.// 읍사무소에서 나눠준 경로목욕티켓 빨간 딱지의 무게는 과분한 대접을 받는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고 세상 참 살기 좋아졌다며 김 서린 탕 속으로 들어간다./ 점심은 제가 살게요, 괜한 헛돈 쓰지 마라 손사래 치며 한사코 마다하시더니 널찍한 온천뷔페식당 햇볕 따스한 창가에 합죽한 웃음 부려놓고 실눈을 뜬다.// 나이 먹는다는 건 수북하던 접시를 천천히 비우는 일, 오늘 식탁 위에 놓인 하얀 접시 저 여백의 무게가 참 환하다.(강문숙, ‘무게에 대하여’)

자루의 주둥이가 풀리면서 묵은 완두콩이 쏟아졌다. 쪼그라든/ 껍질, 낱알마다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채/ 견딜 수 없이 가벼워진 목숨./ 아직도 구멍 속에 코를 박고 있는 바구미들./ 수많은 낮밤을 완두콩과, 완두콩을 갉아먹는/ 벌레들로, 자루의 속은 얼마나 들썩거렸을까./ 푸른 떡잎과 싱싱한 넝쿨손을 갉아먹히면서/ 완두콩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벌레를 껴안고 사방으로 굴러가는 완두콩/ 자루가 해탈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무한천공을 떠다니는 지구 덩어리/ 거대한 자루 속, 함께 들썩거리며/ 나도 쉬지 않고 세상을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완두콩과 벌레와 자루가 서로 껴안고 구를 때/ 삶은 굴렁쇠처럼 반짝이고 있다.(강문숙, -‘자루 속에서’)

가끔 누군가 나이를 물어오면 저는 농 삼아 ‘이백 살’이라 답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시처럼 이만 여일 또는 사십육만 여시간 동안 ‘쉬지 않고 세상을 갉아먹는 중’이구나 생각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끈질기게 되풀이되는 무한 시간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아인슈타인은 어리석은 일이라 했다지요. 시간이 가장 힘이 세다고 물리학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문학은,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에게 불을 전하고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처럼 그 시간에 대항하는 헛된 ‘짓’일지도 모릅니다. 무소불위의 시간에 대항해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채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삶과 ‘구멍 속에 코를 박고 있는 바구미’들에 불과할지 모르는 존재의 가벼움을 매 시간 깨닫게 하는 가혹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햇볕 따스한 창가에 합죽한 웃음 부려놓고 실눈’을 뜨는 그런 눈물겨운 것이 글 쓰는 행위임을 알지라도 작가들은 씁니다. 왜냐고요. 오히려 어둠을 드러나게 한 것이 빛 아닌가라는 비관주의도 있지만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인간을 밝힌 것처럼 글이 고해(苦海)를 표랑하는 인간에게 미약하나마 한 가닥 빛일 수도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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