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권력에 대하여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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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2-26   |  발행일 2016-12-26 제31면   |  수정 2016-12-26
허석윤 논설위원
20161226
허석윤 논설위원

2003년 미국 유타주 블루 존 캐니언에서 있었던 일이다. 홀로 등반을 하던 한 청년이 협곡 사이를 지나던 중 굴러온 바위에 오른팔이 끼이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바위에 짓눌린 팔을 빼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곳은 너무도 외진 곳이어서 도움의 손길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희망은 사라져갔고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옴짝달싹 못하고 그렇게 닷새를 버텼다. 가지고 있던 마실 물조차 바닥나자 모든 걸 체념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육신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서 ‘팔은 자신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라는 자각을 얻었다. 마침내 그는 등산용 칼로 자신의 손목을 잘라내고 죽음의 계곡을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됐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져 국내에서 상영되기도 했는데, 실제 주인공 아론 롤스턴의 회고담이 걸작이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팔 이상의 존재임을 알게 되자 내 손목을 잘라내는 게 너무도 기뻤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아 행복하게 사는 미래를 생각하느라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물론,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고 해도 아론 롤스턴처럼 자신의 손목을 자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닥친 순간까지도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대다수 사람은 살아가면서 신체나 소유물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소유물 중에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신체보다 애지중지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강렬한 것이 권력욕이다. 권력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전에선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이라고 규정한다. 사회나 인간관계에서 작동하는 모든 힘의 원천이라는 해석도 있다. 심지어 철학자 니체는 권력을 생명이 있는 존재의 근원적 성격으로까지 간주했다. 사람이 권력을 추구하는 게 본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잉태될 수 있는데 권력의 내재화가 그것이다.

사람은 권력을 가질수록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자기가 쓴 ‘감투’가 본래부터 자기 것이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권력이 선사하는 화려함과 달콤함을 영원히 누리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권력자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리는 대상은 그가 아니라 그가 쓴 ‘감투’일 뿐이다. 누구라도 모를 리 없건만 권력자는 이런 사실을 착각하거나 애써 외면한다. 그래서 많은 권력자들은 스스로 쳐놓은 권력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같은 권력과의 동일시는 많은 사람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청와대에 살았던 박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권력의 체화(體化)가 빨랐을 것이다. 이후 희대의 사기꾼 집단인 최태민 일가와의 결탁은 그를 권력의 화신으로 만드는 촉매제가 됐다. 결국 최순실과 함께 주도한 대국민 사기극은 성공했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 국민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듯이, 너무도 참담하다.

박 대통령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만약 2014년 정윤회 문건 파동 때 세상에 드러난 자신의 오른팔 최순실을 잘라냈더라면 이 지경에까지 이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최순실이 자신의 전부라는 착각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최순실의 나라’가 가능했던 데는 박 대통령뿐만 아니라 청와대와 정부 내에 득실거린 권력충(蟲)들의 활약도 컸다. 여기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민주사회에서의 권력은 무조건 떠받들어야 할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린 언제나 썩은 정치에 발목 잡힌 봉건국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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