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영화 ‘판도라’ 재혁役 김남길

  • 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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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2-23   |  발행일 2016-12-23 제43면   |  수정 2016-12-23
차도남서 순박한 청년으로…“많은 여운을 주는 배우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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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쑥한 외모에 댄디하고 시크한 매력을 자랑하는 배우 김남길(35). 대중은 그런 그에게서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 이미지를 자주 떠올린다. 그동안 출연했던 드라마나 영화에서 길들지 않은 야성미와 카리스마를 내뿜는 캐릭터를 주로 맡았던 영향도 있다. 2014년 개봉한 코미디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 허세 가득한 산적 역할로 가벼운 연기를 선보인 적도 있지만 대개 진중함과 무게감이 느껴지는 배역이 그의 몫이었다. 그런 그가 엄중한 시기에 범상치 않은 작품에 출연해 연기적으로 의미있는 변화를 이뤄냈다. 그는 현 세태와 오버랩되는 이야기로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판도라’에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순박한 청년으로 분했다. 차갑고 도회적인 느낌의 김남길을 이 영화에서는 결코 찾아볼수 없다. 특유의 깊고 강렬한 눈빛과 남성미를 간직한 캐릭터를 내려놓고 인간애로 무장한 소시민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줬다. 최근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남길은 영화의 소재이기도 한 원자력 발전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좋은 스토리·인물 욕심나 흔쾌히 출연
평범한 소시민의 인간애 부각한 연기
완벽한 사투리보다 정서적 전달 무게

가상 설정이 현실과 맞닿아 유독 섬뜩
무작정 정부 비판하는 메시지가 아닌,
원전정책 변화 필요성 제기하는 영화”

재능기부 문화예술 NGO ‘길스토리’
2013년 팬들과 나눔활동 계기로 결성
내년부터 청년 단편영화 지원사업도



◆가상의 얘기가 현실로 다가오니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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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는 국내 최초로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소재로 한 영화다. 남부지역에 진도 6.1이라는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이 발생하고 그 여파로 노후된 원전 한별 1호기가 폭발하면서 주변 마을은 물론 전국이 순식간에 방사능 공포에 휩싸여 재난 속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김남길은 이번 영화에서 겉보기엔 다소 철 없어 보이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원자력 발전소 직원 재혁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예고 없이 찾아온 초유의 재난 속에서 정부의 안전 대응 컨트롤타워 기능은 상실되고, 2차 폭발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사고 현장에 다시 들어가는 희생자들은 재혁을 비롯한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이다.

4년 전 기획 당시만 해도 가상의 설정이었지만, 지난 9월 경주에서 관측 이래 최대 규모인 진도 5.8의 강진이 실제로 발생하면서 영화는 의도치 않게 현실성을 갖게 됐다. 일각에서 정부의 원전 확대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경주 지진 이후 원전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진 데다 탄핵 정국과 맞물린 사회 비판적 영화라는 인식이 깔리면서 상당한 후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는 촬영 종료 후 1년6개월 만에 개봉을 했다. 영화 관계자들은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제작 과정에서 투자자들의 투자 철회와 거듭되는 개봉 지연으로 정치적 외압설이 불거지기도 했다.

“후반 작업이 늦어지긴 했지만 안전불감증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나라의 미래인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라고 생각해 일찍 개봉되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개봉이 안 되니까 초반에는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게 됐는데 그사이 경주에서 지진이 난 거예요. 그 때문에 영화에서도 지진의 강도 자체를 바꿨습니다.”

김남길은 경주 지진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솔직히 촬영할 때는 피부로 느낀 적 없는 상황을 연기해야 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일본의 경우를 대입하는 정도였죠. 배우들끼리도 지진이 나면 건물이 얼마나 흔들리고, 원전 폭발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갖는지 등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가장 주력한 부분이 현실감이었는데 실제로 지진이 발생하니 더 고민이 되는 거예요. 당황스러웠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만든 영화인데 이것이 현실로 다가오니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민감한 소재에다 사회성 짙고 비판성 강한 영화에 선뜻 출연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지만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이번 작품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는 “일단 스토리가 좋았다. 또 배우로서는 극중 한두 장면 때문에 출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는데 재혁이라는 인물에 욕심낼 만한 부분이 있었다”며 “이 전에도 많은 일(재난)들이 있었고 영화로 만들어졌다. 지진은 컨트롤타워가 완벽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고 더구나 당초 가상 이야기였다. 소재 때문에 출연을 고민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 제작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장소 섭외가 이뤄졌다가 취소되고, 지방자치단체에서 촬영을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영화를 찍는 동안 배우들은 몰랐는데 힘들었을 법합니다. 영화를 보신 분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겁니다. 생각보다 영화가 잘 나온 것 같아 만족합니다.”

공교롭게도 탄핵 정국과 맞물려 영화가 개봉하면서 일부 장면은 편집됐다고 한다. 그는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왜곡돼 무작정 정부를 비판하는 걸로만 보여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대통령 관련 장면 일부가 빠졌다고 들었다”고 했다.

◆영화 찍으면서 원자력 발전소에 관심 생겨

김남길은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처음으로 원자력 발전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전문가가 아니고선 알기 힘든 분야를 다루다 보니 제작진은 다방면의 자료조사와 사전 연구를 오랫동안 진행했고, 김남길 역시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원전에 대해 공부하고 박정우 감독과 영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김남길은 경주에 위치한 월성 원전 홍보관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배우들이 시나리오만 보고는 내용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어요. 감독님이 냉각수를 비롯해서 많은 걸 설명해줘도 현장에선 배우들 모두 멍한 상태였죠.(웃음) CG(컴퓨터그래픽) 작업이 안 된 상태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내부 모습을 상상하기 힘든 면이 있었습니다.”

제작진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원자력 발전소 내부의 복잡하고 전문적인 시설들을 사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고심했다고 한다. 김남길은 “감독님이 고리 원전이랑 비슷한 형태로 보존돼 있는 필리핀 바탄 원자력 발전소를 직접 보고 구조적인 부분을 참고했다”고 전했다.

당초 이 영화는 안전 사각지대를 줄이고 방사능 누출 사고 위험을 사전에 대비하자는 의미에서 출발했지만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좀 더 구체적이다. 원전 정책에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전 증설에 대해선 찬반 논쟁이 뜨겁습니다. 원자력 발전으로 인해 전기를 싸게 쓸 수 있는 건 분명한데 방사성폐기물 안전관리 등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독일은 지금 갖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줄여가면서 대체 에너지를 개발해 균형을 맞춰가고 있다고 합니다. 독일은 공존에 대해 효과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셈이죠. 어떻게 활용하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원자력은 정진영 선배님의 극중 대사처럼 선물이 될 수도 있고 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담 인력을 충원하는 것은 그저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원자력 발전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미래를 위한 (더 나은 에너지 정책을)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판도라’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그려낸다. 방사능 오염 지역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심리와 다른 한편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려는 마음이 혼재하는, 양가적 존재인 인간을 고찰할 수 있다. 김남길은 “사람은 모두 이중적이며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며 “재혁을 연기할 때도 뭐가 정답인지 모른 채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결국 재혁이 마지막으로 보여준 것은 뜨거운 인간애였다. “재혁을 소시민적 영웅으로 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등 떠밀려 나간 측면도 있어요. 동료애, 가족애 중 어디에 포커스를 맞출까 하다가 통으로 인간애를 보여주자 했어요. 다소 신파적이긴 하지만 이게 한국적인 재난영화라고 봅니다.”

김남길은 자신의 경상도 사투리 연기가 다소 어색하다는 지적에 대해 “준비 기간이 한 달밖에 없어서 고민이 많았다”며 “감독님도 처음엔 재혁을 서울로 유학 가서 돌아온 인물로 설정하는 걸 고민하셨다. 그러다 정서적으로 잘 전달되게만 하자고 한 게 그 정도였다”며 스스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내가 가진 재능으로 남을 돕는 길을 찾는다

김남길은 본업인 연기 외 일로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문화예술인들과 힘을 합쳐 출범한 문화예술 NGO ‘길스토리’의 대표다. ‘길스토리’는 김남길이 2013년부터 팬들과 함께한 나눔활동으로 출발했으며 지난해 초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됐다. 작가, 화가, 작곡가, 영상감독, 사진작가, 음악감독 등 각 분야 전문가 100여명이 재능기부를 통해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길을 주제로 한국 문화와 정서를 알리는 ‘길을 읽어주는 남자’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영화 ‘판도라’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처럼 저희가 만드는 콘텐츠 또한 그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기본적으로 서로 도우며 다 같이 잘 살자는 의미입니다. 제도가 아닌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통해서 말입니다.”

‘길스토리’는 내년부터 ‘청년 단편영화 지원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그는 “올해 유럽단편영화제(EUSFF) 조직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느꼈다. 자본이 없어서 꿈을 포기하는 일은 없게 하려고 한다”며 “제가 하는 일과 관련돼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 영화 쪽 사업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남길은 정서적으로 여운을 남기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릴 적에는 그 배우 하면 일컬어지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슬픈 눈빛과 어두운 이미지를 가진 캐릭터를 찾곤 했지요. 양조위와 장첸을 롤모델로 삼고 그들이 출연했던 작품을 참고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번에 ‘판도라’에서 츤데레 둘째 아들 역할을 하면서 그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새롭다고 평가해주면 좋겠는데 예전의 도시적이고 나쁜 남자 이미지와 달라 거부감을 갖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늘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한 요건과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예전엔 다소 거창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이 심플해지는 것 같아요. 정서적 여운을 남기고자 작품마다 고민하고 있습니다.”

글=김명은기자 drama@yeongnam.com·사진제공=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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