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대구 달성군 옥포면 기세마을 송해공원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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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2-16   |  발행일 2016-12-16 제36면   |  수정 2016-12-16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저수지…가녘 물속의 나무들이 수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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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지 송해공원의 길이 391m, 폭 2.5m의 수중다리 백세교와 팔각정자인 백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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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곡 가파른 골짜기에 자리한 기세마을. 지붕들 너머로 옥연지가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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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계정. 소계 석재준을 기려 세운 일제강점기의 정자로 마을 중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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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지 송해공원 초입의 대형 물레방아. 주변에 ‘용의 알’이 놓여 있다.

옥포의 기세곡천(奇世谷川). 비슬산에서 흘러내리는 여러 물줄기 중 하나다. 본류에 기세천, 기세1천, 솔밭천 등 6개의 소하천이 합류해 낙동강으로 간다. 물줄기는 직선에 가깝고 급한 경사를 이룬다. 상류에는 용연사(龍淵寺)가 자리한다. 중류에는 옥연지가 있고 그 곁에 기세마을이 있다. 그래서 옥연지는 오래전부터 기세못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 저수지에는 새로운 이름 하나가 더 생겼다. 송해공원이다.

입구 ‘송해공원’표지석 뒤엔 물레방아
수면위 날렵한 백세교와 데뚝한 백세정
상습범람 기세곡천…올초 정비 결과물

옥연지 동쪽 산자락에 터잡은 기세마을
공원 맞은편 열녀비·마을 중간 소계정


◆옥연지 송해공원

너른 물이다.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더 넓게 보인다. ‘옥포 용연사’, 혹은 ‘용연사 벚꽃길’을 찾아 올 때마다 언제나 눈길을 주었던 저수지다. 그때는 이만큼 넓게 보이지 않았다. 저수지의 가장자리를 따라 낮은 물속에 뿌리 내린 무성한 풀과 나무들 때문이었나. 산골의 정취 담뿍하고 꽃철 외엔 한가로운 곳이라 늘 느리고 느긋이 완상하던 곳이었다.

차들이 꼬리를 문다. 천막을 세워 지은 간이 상점에는 농산물들이 봉지봉지 놓여 있다. 기세 골짜기에서 나고, 옥연지 물 먹고 자란 것들이다. 저수지 입구 거대한 바위에 ‘옥연지 송해공원’이라 새겨져 있다. 그 뒤로 커다란 물레방아가 철퍽철퍽 돌아간다. 옥연지 수면 위에는 ‘백세교’ 다리가 날렵하게 뻗어 있다. 다리 가운데에는 ‘백세정’ 팔각정자가 데뚝하다. 저수지 가 낮은 산 아래로 걷는 사람들의 행렬이 조그만 준동처럼 보인다. 멀리 산과 산 사이에 옥연지 제방이 수평선으로 놓여 있다.

기세곡천은 해마다 상습적으로 범람했다 한다. 옥연지 제방의 여유 높이는 부족했고, 하천의 단면은 좁았으며, 천을 건너지르는 다리들도 낮고 낡았다. 그러나 기세곡천은 그동안 하천정비 및 주변 환경 정비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 정비 사업에서 대체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결국 이러한 오래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달성군은 기세곡천 정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국토교통부 주관의 하천사업 제안공모에 제출, 선정되었다. 올해 초다. 기세곡천은 2020년까지 하천환경정비, 하천제방보강, 노후교량 개체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송해공원은 그러한 기세곡천 정비 사업의 하나였다. 지역 상권의 활성화를 유도하고 달성군을 대표하는 친수지구를 만들겠다는 계획의 결과물이다.

송해는 ‘전국 노래자랑’의 진행자다. 연예인의 이름을 딴 공원이라니, 좀 의아할 수 있다. 달성군과 송해의 인연은 깊다. 황해도 출신인 그는 6·25전쟁 때 남쪽으로 왔다. 원래 이름은 송복희였으나, 배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바다 해(海)로 바꾸었다. 새로운 출발이었다. 이후 달성공원에서 통신병으로 군복무를 시작했고 그때 부인을 만나 인연을 맺게 된다. 부인 석씨는 옥연지 옆 기세마을 사람이었다. 그는 1983년 옥연지가 보이는 산기슭에 산소 터를 마련했다. 부인의 고향은 그에게 제2의 고향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2011년 달성군 명예군민, 2012년 달성군 홍보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특정 연예인의 이름을 딴 공원을 조성하는 일은 처음부터 많은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옥포 면민들은 공원 조성에 적극적이었다. 지역 주민들은 송해 공원을 원했다. 지금 옥연지에는 3㎞ 구간의 송해 둘레길, 옥연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4곳, 제방 옆 계곡에 걸린 아치형 다리, 대형 물레방아, 백세교와 백세정 등이 조성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용연사 벚꽃길’이 아닌 ‘옥연지 송해공원’을 찾아온다. 둘레길 중간에는 상수리나무와 고욤나무 연리목, 감태나무 연리지 등을 만날 수 있다. 공사 중 일제강점기 금을 캐던 폐광산도 발견되었다 한다. 길이 120m, 폭 2.7m, 높이 1.9m 규모의 광산 동굴은 다양한 체험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 기세마을

기세마을은 옥연지의 동쪽 산자락에 자리한다. 마을길이 가팔라 골 깊은 기세곡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기세곡, 기세천, 기세마을. 기이한 세상의 ‘기세(奇世)’인가. 그러나 이 이름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한다. 입향조는 기세석씨로 휘는 언우(彦佑), 호는 인산당(仁山堂)이라 한다.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로 활약했고 정란 이후 입향했다 한다.

기세마을 표지석을 지나 조금 오르면 기세석씨의 대종당인 인산당(仁山堂)이 높은 석축 위 높은 담벼락을 두르고 앉아 있다. 그 앞을 지나 마을의 중간쯤까지 오르면 일제강점기의 정자 소계정(小溪亭)이 자리한다. 역시 높은 석축 위에 앉아 있어 삼문 앞에 서면 마을 지붕들 너머 옥연지가 반짝인다. 소계정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정자다. 소계 석재준의 호를 딴 정자로 1923년 그의 제자들이 지은 것이라 한다. 인재를 길러야 나라가 부강해 진다고 믿었던 소계선생은 학당을 열어 후학 양성에 몰두했던 선비라 전해진다.

걸음마다 개들 짖는 소리가 릴레이로 따라온다. 마을 위쪽 전망 좋은 비탈은 몇몇 양옥이 차지하고 있다. 높이 오를수록 옥연지가 넓다. 마을에 있다는 열녀비를 찾을 수가 없다. “아, 도로에서 위쪽으로 좀 올라가면 길가에 보일 거야.” 고샅길에서 만난 동네 어르신이 알려주신다. 기세마을에는 조금 무시무시하다 싶은 열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마을로 시집 온 진주강씨는 출가한 지 한 달 만에 남편을 잃게 되었다 한다. 그녀는 남편과 합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집안사람들은 유언을 따르지 않고 장례를 별장으로 치렀다 한다. 그때부터 집안과 마을에는 예기치 못한 변고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의 대들보가 내려앉았고, 마을의 가축들이 까닭 없이 죽어갔으며, 해마다 심한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치는 일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이런 일들이 강씨의 유언을 들어주지 않은 탓이라 생각했다. 마을에서는 그녀의 시신을 남편과 합장한 후 성대하게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때 하늘에서 기이한 빛과 단비가 쏟아져 내렸다 한다. 이에 마을사람들과 문중에서는 열녀비를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강씨의 열행을 기리고 있다.

강씨의 열녀비는 송해공원 입구 맞은편에 자리한다. 공사 중인 건물의 바로 곁에서 낮은 침묵으로 서있다. 외담 주변에는 풀들이 무성하다. 꼬리를 물고 공원으로 들어가는 차들은 아무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 화원 지나 5번 국도 현풍 방향으로 간다. 화원옥포IC네거리에서 좌회전해 용연사 쪽으로 계속 오르다 보면 오른쪽에 옥연지 송해공원이 자리한다. 옥연지 제방 아래쪽에 3, 4주차장이 있고 송해공원 표지석이 있는 입구 쪽에 1, 2주차장이 있다. 옥연지의 중간 즈음 왼쪽에 기세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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