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앵그리 스튜던트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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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2-15   |  발행일 2016-12-15 제35면   |  수정 2016-12-15
[영남타워] 앵그리 스튜던트

“아빠, 내일 서울 광화문집회에 가야겠어요.”

“거긴 왜?”

“뉴스를 보고 친구들과 시국토론을 하다 도저히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지난달 11일 밤 야간자습을 마치고 귀가하던 아이(고교 2년)가 화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튿날 토요일 아침 일찍 아이는 친구 두명과 함께 광화문으로 향했다. 아내가 강하게 만류하고 담임 선생님까지 전화가 와 저지했으나 아이는 ‘아빠와의 동행’을 협상조건(?)으로 걸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아이와 함께 상경버스에 오른 나는 왜 광화문에 가려고 하는지 다시 물었다.

“나중에 결혼해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가 커서 ‘아빠는 2016년에 뭐했느냐’고 물었을 때 ‘난 공부만 한 게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라고 말하고 싶어서요.” 아이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이날 광화문엔 100만명의 시민이 촛불을 들었다.

이보다 앞서 지난달 5일 밤 2·28기념중앙공원 촛불집회에서 조성해양(대구 송현여고 2년)의 시국관련 자유발언이 화제가 됐다. 이 발언은 인터넷 동영상으로 퍼져 삽시간에 전국을 뜨겁게 달궜다. 도올 김용옥 교수조차 조양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이어 지난달 19일 3차 대구시국대회에서 대구지역 고교생 500여명은 ‘대구청소년시국선언단’이란 현수막을 펼친 채 중앙로와 국채보상로를 행진했다.

56년 전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패와 횡포, 민주주의 유린에 맞서 행진했던 바로 그 행로였다. 나는 2·28주역의 손자뻘 아이들이 “박근혜 퇴진”이라고 외치며 질서있게 뛰어가는 광경을 카메라로 기록했다.

거기엔 ‘군부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행진했던 30년 전 모습은 없었다. 난무했던 최루탄과 화염병, 짱돌, 방독면, 백골단도 보이지 않았다. 2·28대구민주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승격시키려는 운동이 점화되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느낌은 한마디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날 한 여고생에게 어떻게 집회에 올 수 있었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야자(야간자율학습)를 빼먹고 왔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와 달리 버스정류장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할머니들은 “아이고! 이제 얼라들까지 동원했네”라며 혀를 끌끌 차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할머니들의 염려와 달리 동원된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결단했으며 실천으로 옮긴 것이리라. 아이들은 세월호가 가라앉을 때처럼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이다.

87항쟁 때는 대학생과 넥타이부대가 주도했지만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순수한 ‘앵그리 스튜던트’가 대거 합세해 집회 규모를 불렸다.

10월29일부터 시작돼 지난 10일까지 열린 촛불집회참석 연 인원은 전국 750만명, 대구 16만명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비폭력, 평화적으로 진행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외신은 질서정연한 촛불집회를 경이롭다고 보도했다. 한국의 촛불집회는 ‘무혈촛불시민혁명’으로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킬 만하다.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면 그 정권은 끝’이란 말을 실감케 하듯 결국 박 대통령은 촛불민심 아래 국회에서 ‘1(퇴장)234(찬성)56(반대)7(무효)’이라는, 국민탄핵요구 78%와 똑같은 비율로 탄핵을 당했다.

이제 탄핵의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헌재는 촛불민심이 염원하는 뜻을 정확히 받들어 가능한한 조속히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촛불이 횃불로 변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살아갈 앵그리 스튜던트에게 더 이상 부끄러운 어른들이 돼선 안 된다.박진관 기획취재부장 사람&뉴스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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