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남해군 남해도 서남길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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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2-02   |  발행일 2016-12-02 제36면   |  수정 2016-12-02
노량해전의 그 바다를 흠모하는 길·川·돌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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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번 도로 해안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돌탑을 만난다. 멋진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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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번 도로가 1024번으로 바뀌는 즈음, 섬 밭은 조금씩 계단모양이 뚜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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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사촌해수욕장. 길에서 처음 만나는 모래, 처음 만나는 해수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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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본 가천 다랭이 마을. 집들은 양지에 논을 일구고 자신들은 응달에 모여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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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면 달실 앞바다. 대사천이 흘러들고, 노량 해전의 기억을 가진 바다다.

붉은 남해대교를 타고 노량 바다를 건너지른다. 남해도에의 착지는 첫걸음부터 언덕져 근육이 단단해진다. 노량 공원을 스치고, 잎 다 떨어진 벚나무 길에 들어서자 조금씩 몸이 느슨해진다.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지를 지나친다. 초입의 길가 정비가 한창이다. 곧 탑동 삼거리에 이르고, 시원한 몸매로 유혹하는 19번 도로를 물리치고 해안길로 들어선다. 바다로 난 77번 국도다.

방치됐던 천변 둑에 열지어 선 돌탑 곁
꽃계절엔 유채·장미·코스모스 차례로

해안 다다르자 산비탈 타고 굽이진 길
밭은 차곡차곡 좁고 가파른 계단 모양
낭떠러지 카페촌 지나 가천다랭이마을
양지를 논에 내준 응달의 집들에 눈길


◆77번 국도, 포상리에서 유포까지

바다가 보인다. 길과 나란히 대사천(大寺川)이 바다로 향한다. 물 마른 천변 둑에 돌탑들이 열 지어 바다로 향한다. 길과 천과 돌탑이 진군하는 로마의 군인 같다. 허허로운 광경 속에 서늘한 기운이 돈다. 제주의 방사탑처럼, 오랜 사연과 기원이 있는 걸까. 실제 탑이 세워진 것은 지난해라 한다. 그간 하천 정비와 도로공사로 국·공유화되어 수년간 방치되었던 땅이다. 지난해 인근 마을 주민들이 이곳을 정비해 탑을 세우고 꽃을 심었다. 지난 꽃 계절에는 유채와 장미와 코스모스가 차례로 피어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천은 포상리 앞바다로 흐르고, 탑은 바다 앞에서 멈춘다. 바다는 노량 해전의 기억을 품고 있다.

남해군은 수많은 섬의 집합체지만 남해는 곧 남해도로 여겨진다. 남해도는 나비모양의 섬이다. 지금 달리는 길은 나비의 왼쪽 날개, 서쪽의 가장자리다. 남해도의 서북 끝에서 사선으로 가로질러 남동을 휘감는 19번 도로 덕에 이 해안길로 들어서는 이는 드물다. 트럭 한 대가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며 지나간 이후, 도로는 텅 비어 있다.

길은 달실을 지나 갈화리로 간다. 바다 너머로 하동의 산업단지가 보인다. 바닷가에는 어디에나 작고 푸른 밭이 있다. 비교적 너르고 평평한 밭은 자신이 땅에 속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안정된 모습이다. 남해 삼베마을 안내판을 본다. 폐교를 이용해 삼베 체험장과 전시장, 판매장으로 만든 곳이다. 섬 여인이란 언제나 고단함과 연결된다.

갈화 지나 유포까지, 한동안 바다 너머 광양의 거대한 제철소가 흐릿한 실루엣으로 따라온다. 본격적인 서쪽 해안길이 시작되기도 한다. 섬의 내륙 쪽에는 망운산이 솟아 있고, 그래서 해안은 조금 기울기를 가진다. 밭들도 좀 더 차곡차곡한 계단의 모습이 된다. 길은 산사면을 타고 오르내리며 급하게 굽이진다. 지금은 오후 3시30분. 굽은 길은 남서하늘의 태양빛에 이따금 사라져버린다. 위험하다.

◆1024번 지방도, 중리에서 가천까지

유포에서 중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나자 77번 국도가 1024번 지방도가 되어 있다. 급작스럽고 갸웃한 전환이다. 밭들은 좁고 가파른 계단이 된다. 땅보다는 바다에 속해있는 듯, 그렇게 미끄러진다. 자꾸만 뒤를 보게 된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내내 쫓아오는 울퉁불퉁한 땅덩어리가 다른 도시인지, 내가 지나쳐온 길이 꼬리로 붙어 오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땅이라는 사실은 내 발밑의 땅이 둥둥 떠내려가 표류하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을 준다.

이 길에서 처음으로 모래를 만난다. 사촌(沙村) 해수욕장이다. 고샅길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이 들어서는 차를 흥미롭게 바라보신다. 해변은 300여 년 전에 심었다는 소나무들이 감싸 안고 있다. 주차장과 샤워장, 탈의실, 화장실이 갖춰져 있고, 작은 편의점은 불이 꺼져 있다. 수수하고 아담한 모습이다. 모래는 대단히 부드럽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에 할머니들은 온데간데없으시다. 크게 굽은 고개에 오르자 저 아래로 거뭇한 해변이 보인다. 선구 몽돌해안이다.

몇 번, 읍으로 가는 이정표를 만난다. 어이, 이리로 가면 읍으로 간단다, 가천으로도 간단다, 가지 않을래? 라며 엄청 솔깃한 유혹을 한다. 그 유혹을 당당히 외면하고 가던 길을 따르면, 서서히 상승하는 땅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해변을 향해 미끄러지던 밭들이 사라지고, 바다에는 섬들도, 육지의 실루엣도 사라지고, 갑자기 땅덩어리는 훅 솟구쳐 거대한 단애로 선다. 길은 그 가장자리를 따라 아슬아슬하게 날아오른다.

신기한 것은, 한 뼘 갓길도 없는 도롯가에 차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그 꽁무니에 차를 대고 보니 저 저 저 저 까마득한 아래 갯바위마다 낚시하는 사람들이다. 길 안쪽에는 높디높은 축대 위에 으리으리한 카페와 펜션들이 앉았다. 사람이 못할 일이란 없다. 이 낭떠러지 카페촌은 그리 길지 않다. 길은 다시 쑥 하강하고 얕은 파도를 타듯 오르내린다. 그리고 완전한 남쪽에 도달했음을 느낀다.

◆남쪽 끝, 가천 다랭이 마을

제법 가파른 오르막에 가천 다랭이 마을 전망대가 있다. 관광 안내에 등장하는 마을의 대표사진이 이곳에서의 전망이다. 집들은 응달에 모여 있다. 사람들은 양지를 논에 내어 주었다. 마을의 동쪽 끝자락에서 내려다본 다랭이 논은 무척 아름답다.

다랭이 마을에서 몇 걸음 만에 동쪽 앵강만으로 접어든다. 서포 김만중이 유형의 삶을 마감했던 노도가 보인다. 남해도 오른쪽 날개의 서안과 금산 봉우리도 보인다. 남해도 왼쪽 날개의 남쪽 해안길은 매우 짧다. 그러니 조금 더 길게 시선을 남쪽에 둔다. 남쪽 바다 남해를 당돌하게도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남해가 자신 있게 펼쳐놓은 바다 쪽으로. 두 척의 배가 저 바깥 경계선의 빛나는 윤슬 속에서 서로 만난다. 부드러운 숭고함의 순간이다. 그들은 서로 지나쳐, 서로에게서 멀어진다. 너무도 조용하고 부드럽게 멀어져선 각자 자신의 길을 간다. 혼자서 간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 창원방향으로 간다. 칠원분기점에서 진주방향, 산인분기점에서 10번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하동IC에서 내린다. 하동교차로에서 이어진 19번 국도를 타고 남해대교를 건너 직진한다. 탑동 교차로에서 오른쪽 서면방향 77번 국도에 오르면 된다. 남해에는 ‘바래길’이 있다. 그중 14코스 ‘망운산 노을길’이 갈화에서 시작되고, 1코스 ‘다랭이 지겟길’이 가천 다랭이 마을에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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