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박정희 패러다임의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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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30   |  발행일 2016-11-30 제31면   |  수정 2016-11-30
[영남시론] 박정희 패러다임의 종언
박상병 정치평론가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붕괴’하고 있다. 반세기 넘게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국가 운영의 총체적 방식’이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 부문에서의 권위주의적 통치행태, 경제 부문에서의 국가주도형 성장주의 전략과 사회 부문에서의 진영주의적 기득권 구조가 통째로 붕괴되고 있다. 그리고 외교안보 부문에서의 냉전적 대결주의도 이미 생명을 다한 듯하다. 이처럼 붕괴되고 있는 기존의 국가운영 방식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국가주의’로 압축되는 ‘박정희 패러다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은 군부독재의 종식을 이끌어 내긴 했지만 ‘민주화로의 이행’은 더디기만 했다. 제도와 절차에서의 형식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뤄냈지만 ‘실질적 민주주의’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콘텐츠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헌정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루고 탈권위주의를 지향한 노무현정부까지 들어섰지만 그 한계는 너무도 뚜렷했다. 기본적으로 박정희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혁명적 변화 대신 정권 안정에 무게를 두다 보니 박정희 패러다임 틀 내에서의 제한적 변화를 시도하는 선에 머물고 말았다. 결국 노무현정부의 실패는 취약한 권력기반과 무기력한 정책추진, 그리고 정치력 빈곤이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박정희 패러다임을 청산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린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정부 이후의 ‘정치적 반동’은 최근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초래한 거대한 불행의 신호탄이 된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생명이 다한 박정희 패러다임을 부활시키려 했다. 국정운영의 기조부터 통치방식, 국정홍보의 담론까지 노골적이고 구체적으로 ‘박정희의 유산’을 부활시켰다. 특히 신성장주의에 기반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비롯해 관치경제를 통한 정경유착, 그리고 남북 간 대결주의의 복원은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갑자기 ‘새마을운동’ 홍보에 열을 올리거나 국정 역사교과서로의 회귀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비선실세’ 최순실의 조언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또한 박정희 패러다임의 슬픈 유산이 아니던가.

이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결정적 오판을 했다. 시대의 흐름과 민심의 수준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다. 불과 수십 년 만에 한국사회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국민의 의식 수준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직시하지 못한 것이다. 과거 유신시대의 그 방식이 지금도 통할 것으로 봤던 것이다. ‘최순실 일당’과 큰 판을 벌였던 그 언행과 수준을 보노라면 충격을 넘어 절망감이 앞서는 것도 이런 연유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박 대통령은 도대체 뭘 그리 잘못했는지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세 차례의 어처구니없는 대국민담화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태블릿 PC와 안종범의 수첩, 정호성의 녹취파일은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박정희 패러다임의 종언을 기정사실로 이끌고 있다. 탄핵이든 하야든 박근혜 대통령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설사 국회에서 통과된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된다 한들 박 대통령의 리더십이 되살아날 수는 없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했다. 대통령 권력이 이미 신뢰를 잃어버렸는데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박근혜정부의 붕괴는 그대로 지난 55년 동안의 박정희 패러다임의 종언을 의미하고 있다. 이제 한 시대의 끝자락이 손에 잡히고 그동안의 절망과 고통의 끝이 조금씩 보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탄핵이든 하야든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 박정희 패러다임의 종언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매듭지을 수 있을지는 아직 예단하기 이르기 때문이다. 분명 한 시대의 끝이 보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그 끝이 오래 갈 수도 있다. 이제 정치권은 ‘박근혜 이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그 액션 플랜을 보여줘야 한다. 차기 대선까지는 그리 시간이 많지 않다. 구체제를 종식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막할 대안적 정치세력과 그들의 야심찬 비전이 시급하다. 대선 유불리를 놓고 눈앞의 당리당략을 계산할 때가 아니다. 박정희 패러다임의 종언, 그 이후 펼쳐질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실체가 참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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