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昏君의 시대

  • 박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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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21   |  발행일 2016-11-21 제31면   |  수정 2016-11-21
[월요칼럼] 昏君의 시대

정치인 박근혜의 자질과 능력에 의구심이 생긴 건 2012년 ‘지하경제 양성화’를 ‘지하경제 활성화’라고 말할 때부터였다. ‘설마 지하경제 양성화와 활성화를 구분하지 못할까’라고 생각하면서도 두 번씩이나 그런 말실수를 하는 게 의아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인혁당 사건은 두 개의 판결이 있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 미심쩍은 마음은 슬슬 증폭되기 시작했다. 재심(再審)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발언이었다. 한때 박 대통령의 복심이었던 전여옥 전 국회의원은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집에는 책이 별로 없다. 말하는 게 베이비 토크 수준”이라고 힐난했다. 옛 주군에게 독설을 내뱉는 건 마뜩잖았으나, 내가 품은 의구심과 맥락은 닿아있었다.

‘불통의 아이콘’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그렇게나 기자회견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취임 후 지금까지 158번의 기자회견을 했다. 연평균 20회다. 전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연평균 26회씩 기자회견을 했다. 박 대통령의 기자회견 횟수는 취임 후 다섯 번밖에 되지 않는다. 매년 연초에 하는 기자회견이 고작이다. 그것도 대개는 질문 내용을 미리 정해놓고 짜인 각본대로 진행한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너 시간씩 계속되는 기자회견에서 쏟아지는 질문에 즉답하는 모습이 우리에겐 생경할 뿐이다.

‘뒤끝 작렬’도 독보적이다. 박 대통령은 2013년 승마협회 감사에서 정유라 편을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화체육관광부 노태강 체육국장과 진재수 체육정책과장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찍었고, 그 후 노 국장과 진 과장은 한직을 맴돌았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올해 박 대통령은 다시 “이들이 아직 공직에 있느냐”고 다그쳤고 결국 두 사람은 지난 7월 옷을 벗었다.

세월호 참사 때 “내각이 총사퇴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평소 쓴소리를 마다 않은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도 박 대통령에게 찍혀 경질됐다. 쫓아내는 과정도 야비했다. 2014년 6월 유 장관이 공무로 러시아를 방문 중일 때 주러 한국대사관을 통해 일방적으로 경질을 통보했고, 7월 후임자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면직처리됐다. 유 전 장관은 지난달 “내가 나가자마자 바퀴벌레들이 쫙 출몰했다”고 증언했다. 바퀴벌레는 차은택씨 등 ‘최순실 부역자’를 빗댄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갈 즈음 한진그룹과 조양호 회장을 겨냥해 “뭐 한 게 있다고”라며 공개적으로 면박을 줬다. 난 그때 대통령이 특정 기업을 두고 왜 저렇게 날을 세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한진그룹은 미르재단에만 10억원을 내고 K스포츠재단엔 출연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 회장은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으로 있을 때 올림픽경기장 부속시설 공사를 스위스 건설업체 누슬리에 맡기라는 문체부의 압력을 거부했다. 누슬리는 최순실 회사인 더블루케이와 업무협약을 맺은 회사다. 조 회장은 지난 5월 올림픽조직위원장에서 경질됐고,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도 청와대가 결정했다고 한다.

역대 어느 정부든 대통령 측근의 정치 스캔들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급이 다르고 결이 다르다. 지금까지의 비리·부패 게이트가 흑백영화 수준이었다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다. 대통령의 두호(斗護) 아래 최순실씨는 대한민국의 예산·인사를 마구 주물렀다. 청와대 비서실 등 국가 공조직은 일개 사인(私人)에 불과한 최순실의 모리(謀利)와 보복행위에 앞장서거나 이를 방조했다. 상주 승마대회에서 정유라를 제치고 1등 한 선수의 아버지 계좌까지 뒤졌다니 오금이 저릴 지경이다.

봉건시대에도 일어날 수 없는 기이한 풍경이 AI와 VR가 현실화되는 디지털 세상에서 펼쳐졌으니 혼군·암군의 시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대기업에 돈을 내라고 겁박하지 않나, 총수 일가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라고 으르지 않나, 박근혜정부의 청와대 경제수석은 조폭 행동대장이나 진배없었다. 박 대통령은 이미 국민에게 ‘핵비호(극도의 비호감)’로 낙인찍혔다. 촛불 노도(怒濤)는 대통령에게 ‘정치 금치산자’선고를 내렸다. 박 대통령의 선택지는 그리 넓지 않다.박규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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