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나는 누구인가 - 하이데거의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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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14   |  발행일 2016-11-14 제30면   |  수정 2016-11-14
20161114
박소경 (호산대 총장)

어떻게 하면 본래적인 삶
자기 자신으로 살수 있나
답은 치열한 사유에 있다
침묵속에서 이성의 힘으로
양심의 소리 듣고 결단해야


과학은 최근의 책을, 인문학은 오랜 기간 검증된 책을 보라는 말이 있다. 인문학의 정점에 철학이 있으나, 너무 무겁고 진지하다며 외면당하고 있다. 2천500년이란 긴 동서양의 철학사, 메이저 철학자만도 50여 명, 저서로는 수백 권이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난해한 철학서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철저함과 깊이로 사르트르, 카뮈, 푸코, 데리다, 가다머 같은 철학자들을 열광케 했고, 현대 철학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으며, 신학, 심리학, 인간학, 문학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인정된다.

우리의 삶을 내부로부터 살펴보자. 우리는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각자의 ‘삶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각자는 다양한 일들에 둘러싸여 염려하며 걱정하고 혹 기뻐하고 만족한다. 인간은 늘 어떤 기분에 잠겨있다. 공부에 몰두할 때에는 냉철한 기분 속에, 별 탈 없이 일상적 삶이 반복될 때는 무덤덤한 무감동 속에 있게 된다. 세계의 상황 속에 내던져진 인간은 자신을 가능성에 내던진다. 각자의 의식과 무의식에는 궁극적 목적에 따라 근본신념(최고의 가치)이 자리 잡고 있다. 미래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각자는 그때마다 신념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 사회에 의해 주입되어온 이 신념이 바뀌기란 쉽지 않다. 이때 사회란 눈에 띄지 않는 타인들의 지배를 일컫는다. 누구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나서 제3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우리는 일상인으로 사람들과 피상적인 ‘잡담’을 나누며, 호기심과 관심과 활동은 세간의 가치에 따라 움직인다. 하이데거는 우리 각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목적연관 전체를 ‘세계’라 부르며, 세계에 마음 빼앗기며 살아가는 평균인을 ‘그들’이라 부른다. ‘그들’은 일정한 세계 이해와 자기 이해 안에서 서로 관계하며,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에 관심을 쏟는다. 그 삶은 책임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어 편리하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도피한다. ‘그들’이 세간의 세계에 빠져 있는 이유는 불안을 야기하는 죽음을 잊고자 함이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 과도한 권력욕과 지배욕, 황금만능주의자가 되어 자기만족하며 사는 삶도 불안을 피하고자 함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삶을 비본래적인 삶, 자기 상실로 본다. 어떻게 하면 본래적인 삶,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나. 그 답은 치열한 ‘사유’에 있다. 인생이 매우 짧고 자신이 한 순간을 살다 가는 존재라는, 자신이 시간에 불과한 존재라는 자각. 이성의 힘으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앞서 바로 보며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양심의 소리를 듣고 결단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알려진 한나 아렌트라는 제자가 있다. 1961년 이스라엘에서는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렸다. 아이히만은 명령에 의해 행정을 이행했을 뿐이라고, 자신은 다만 사람들을 열차에 태웠을 뿐이라 말한다. 재판을 참관한 한나 아렌트는 그 모습에서 놀랍도록 평범한 한 인간을 발견한다. 그녀는 오랜 사유 끝에 “지나치게 단순하고 지극히 평범한 인간 아이히만, 그는 단지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라는 글을 적는다. ‘더 뉴요커’에 그녀의 글이 실리자마자 이스라엘에서는 거대한 폭풍이 일어난다. 친구들마저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옹호하고 동족에게는 잔인하다며 등을 돌린다. 한편 하이데거는 히틀러를 찬양하는 연설을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의 학문적 권위와 명예에 지울 수 없는 허물이 아닐 수 없다. 한나 아렌트,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 “푸른 물감은 쪽풀에서 얻지만 쪽풀보다 더 푸르다(靑取之於藍 而靑於藍).” ‘순자’ 첫 페이지 첫 구절, 청취어람(靑取於藍)은 청출어람(靑出於藍)과 같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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