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지성의 선언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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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04   |  발행일 2016-11-04 제23면   |  수정 2016-11-04
[조정래 칼럼] 지성의 선언

그예, 우려했던 사태가 터지고야 말았다. 2주 전 이 난을 통해 ‘지성의 궐기’란 칼럼으로 지성의 집단저항이 예고된다고 했다. 4·19와 6·10항쟁 당시처럼 학생과 교수들, 지성의 궐기는 ‘반지성’을 무너뜨린다고 경고했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박근혜정부가 초래한 난국을 타개하자면 궐기가 필요할지 모른다고 반쯤 선동하는 품새를 취하기도 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게 아니라 오히려 궐기적 시국선언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막상 시국선언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온 나라를 송두리째 집어삼킬까봐 무섭고도 두렵다. 아무래도 지성의 제어와 진화가 긴요한 시국이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학생과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예고된 인재(人災)라는 점에서 ‘하인리히의 법칙’을 연상케 한다. 박근혜정부의 실패 이전에 수많은 경미한 실패와 징후들이 드러나 왔다. 최순실 사건의 불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에서부터 잠복해 있었다. 박근혜정부가 이를 몰랐거나 애써 외면해 온 결과일 터이다. 박 대통령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이다.

‘보면서도/ 못 믿겠어.’ 하상욱 단편 시집 ‘뉴스’의 구절처럼 국민적 심사는 분노를 넘어 허탈하다. 국민적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고 글로벌 망신살까지 뻗쳤다. ‘무속인, 사이비 종교지도자에게 휘둘린 꼭두각시’ ‘몸과 마음을 최태민에게 조종당한 박근혜’ 등으로 외신은 한국을 국제적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국격 훼손에 분통도 터진다. 일본과 미국, 소련 등 강대국 인간들에게 ‘놈’자를 붙이는 세계 유일의 국민, 우리보다 약한 민족에게는 한없는 친절을 베푸는 인간애를 간직하고 있는 보기 드문 국민, 그 자존감이 일순 무너져 내렸다.

‘죄를 지을 수는 있어도/ 죄를 지울 수는 없어요.’ SNS에 뜬 풍자시가 해법을 제시한다. 결자해지, 이실직고가 답이란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대 결단만 남았다. 국권의 사유화, 헌정파괴의 중죄를 저지른 것은 이미 역사적 사실이다. 더 이상 망설이다가는 역사적 죄인이 두 번 된다. 고립무원이다. 작금의 국정난맥과 국정공백을 수습할 권능이 없음을 고백하고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는 분노, 시국선언에 담긴 국민의 요구이자 명령이다. 이게 도대체 나라이기는 하나, 수많은 자조와 한탄에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

박근혜정부의 실체를 진즉에 알아보지 못한 우리의 잘못도 크다. ‘수능이 20일 남았지만 당신의 무능과 기만에 경악을 금치 못해 뛰쳐 나왔습니다’ 지난달 29일 서울에선 고3 수험생들이 이렇게 쓴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했다. 박근혜정부의 개념 없음은 인혁당 재심 사건 무죄 판결에 대해 ‘두 개의 판결’ 운운할 때부터 파악됐어야 했다. 세월호 참사와 유족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이후 진상규명마저 버젓이 방해하는 것을 보고 눈치챘어야 했다. 생명을 경시하는 칠푼이들의 정부였는지, 눈 뜨고도 못 보는 당달봉사였으니 아쉽고도 아쉽다. 박 대통령이 거듭 고수해 온 ‘흔들림 없는 국정운영’은 불통과 무능의 다른 표현이었음을 늦게나마 안 게 천만다행이다.

‘역사를 잘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으로 된다’는 충고는 알고보니 자기고백이었다. ‘혼이 정상’인 우리 국민이 수습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물어내라. 하늘 보고 삿대질 해봐야 자승자박, 누워서 침뱉기다. 정신을 차리고 심기일전하는 길밖에 달리 묘수가 없다. 위기와 난세에 강인한 능력을 보여 온 민족적 DNA를 복원해야 할 시기, IMF외환위기보다 훨씬 위중한 국난 극복의 저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우리는 이제 세월호 말고, 최순실 사건과 결별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최순실 사건을 쫓는 방관자의 자세를 버리고, 비난과 비판의 대열에서 빠져 나와, 각자 해야 할 일을 찾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박근혜정부는 지금까지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해 왔다. ‘위기의 위기’는 여전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다. 이어지는 시국선언과 촛불 시위, 하야와 탄핵 주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권력 내려놓기’ 결단을 촉구한다. 지성의 선언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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