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뼛속 깊이 스며드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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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31 08:13  |  수정 2016-10-31 08:14  |  발행일 2016-10-31 제18면
20161031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한기태심(旱旣太甚)하야 시절이 다 늦은 때

서주(西疇) 높은 논에 잠깐 갠 녈비에 도상(道上) 무원수(無源水)를 반쯤만 대어 두고 소 한 번 주마 하고 엄섬이 하는 말씀 친절(親切)하다 여긴 집에 달 없는 황혼(黃昏)에 허위허위 달려가서 굳게 닫은 문(門) 밖에 우두커니 혼자 서서 큰 기침 아함이를 양구토록 하온 후에 어와 게 뉘신고 염치 없는 나입니다 초경(初更)도 거의 지났는데 어찌 와 계신고 연년(年年)에 이러하기 구차한 줄 알건마는 소 없는 궁가(窮家)에 헤아림 많아 왔습니다.

공것이나 값을 치나 주엄직도 하다마는 다만 어제 밤의 건너집 저 사람이 목 붉은 수기치(雉)를 옥지읍(玉脂泣)게 구어 내고 갓 익은 삼해주(三亥酒)를 취(醉)토록 권(勸)하거든 이러한 은혜를 어이 아니 갚을넌고 내일(來日)로 주마 하고 큰 언약(言約) 하였거든 실약(失約)이 미편(未便)하니 사설이 어려워라. 실위(實爲) 그러하면 설마 어이할고 헌 멍덕 숙여쓰고? 축 없는 짚신에 설피설피 물러오니 풍채 적은 형용에 개 짖을 뿐이로다.…. 강호(江湖) 한 꿈을 꾼 지도 오래러니 구복(口腹)이 위루(爲累)하야 어지버 잊었도다 첨피기욱(瞻彼其)한데 녹죽(綠竹)도 하도 할사 유비군자(有斐君子)들아 낙대 하나 빌려사라 노화(蘆花) 깊은 곳에 명월청풍(明月淸風) 벗이 되어 임자 없는 풍월강산(風月江山)에 절로절로 늙으리라 무심(無心)한 백구(白鷗)야 오라 하며 마라 하랴 다툴 이 없는 것은 다만 이것인가 여기도다.

무상(無狀)한 이 몸에 무슨 지취(志趣) 있으리만은 두세 이렁 밭논을 다 묵혀 던져 두고 있으면 죽(粥)이오 없으면 굶을망정 남의 집 남의 것은 전혀 부러 말렷노라 내 빈천(貧賤) 싫게 여겨 손을 헤다 물러가며 남의 부귀(富貴) 부럽게 여겨 손을 치다 나아오랴 인간(人間) 어느 일이 명(命) 밖에 생겼으리 빈이무원(貧而無怨)을 어렵다 하건마는 내 생애(生涯) 이러하대 서러운 뜻은 없는도다 단사표음(單食瓢飮)을 이도 족히 여기노라 평생(平生) 한 뜻이 온포(溫飽)에는 없는도다. -(노계 박인로, ‘누항사’ 일부)



가을이 깊어갑니다. 곧 한기가 깊이 스며드는 계절이 되겠지요. 노계 박인로의 누항사, 임진왜란 후 더욱 피폐해진 나라의 가난한 백성들, 그 중에서도 일소를 빌리러 갔다 거절 당한 것을 그려낸 일화는 이 계절만큼 서늘합니다. 그래서 읽고 나면 각인되어 ‘누항사’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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