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에서 주인공 에그시(오른쪽)가 초반에 보여줬던 패션은 차브의 전형이다. |
자유분방한 차브족의 모습. 트레이닝복과 적당히 굽은 모자의 챙, 노골적인 삼선의 아디다스 져지는 차브족의 필수 아이템이다. |
‘어린애’를 뜻하는 집시언어에서 유래
英선 상류층 흉내내는 하층 문화 지칭
정부 복지예산 축내며 흥청망청 소비
영화 ‘킹스맨’ 주인공이 전형적인 차브
‘추리닝’·버버리 모자·프라다 신발 등
절제 없는 꼴불견 패션이 트레이드 마크
폭동 가담도 “그냥 심심풀이” 무개념
차브族, 우리사회도 남의 일 아닌 현실
영국으로부터 브렉시트(Brexit) 소식이 전해진 지도 100일이 지났다. 세상일이 다 그렇긴 한데,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학자들은 사람들이 한 가지 뉴스에 권태를 느끼기 시작하는 시점을 45일이라고 보고, 언론에서 언급이 사라지는 기한을 100일이라고 말한다. 브렉시트도 마찬가지 길을 밟고 있는 셈이다.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몇 년의 유예기간을 둔다고 하니까, 지금으로서 브렉시트는 뉴스 가치가 없는 것도 맞다.
내가 브렉시트를 거창하게 말머리에 단 까닭은 이 사건 속에 담긴 또 하나의 현상 때문이다. 바로 차브(chav) 이야기다. 이건 영국에서 생긴 특별한 문화인 동시에 그들 패거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 빈곤 집단은 나라에서 생활보조금을 받는데, 이 돈을 자식들 학비나 기본 생활비로 쓰지 않고 유명 상표가 붙은 옷이나 술, 최신 휴대폰을 흥청망청 사들이는 행태를 벌인다. 상류사회에서 볼 수 있는 생활양식을 서민이 부러워하며 흉내 내는 일은 꼭 차브족이 아니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귀족과 평민으로 나뉜 계급제도를 유지하는 사회에서, 다른 계급의 생활을 딱히 선망하지도 또 경멸하지도 않고 서로 무관심하게 살아온 영국인에게 차브족의 등장은 꽤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차브’란 집시들이 어린애를 뜻하는 옛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공공장소에서 버릇없이 설치는 애들을 보면서, 어떤 교양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녀석들일지 혀를 끌끌 찰 때가 있지 않나. 다시 말하면 차브는 ‘저질스러운 집시’의 자식 같다는 영국식 속어가 스무 살 넘은 어른을 흉보는 식으로 바뀐 말이다. 그래서 차브를 번역하면 ‘종내기’에 가까울 듯하다. 외래어가 우리말로 스며든 것들 중에서 파르티잔이 변한 ‘빨갱이’, 오타쿠가 바뀐 ‘덕후’와 비슷한 예일 수도 있다. 우리 머릿속에 빨갱이나 덕후들의 모습도 어느 정도 그려지긴 하지만, 차브들의 외양은 아주 뚜렷하게 박혀있다. 바로 이들의 옷차림 때문이다.
영화 ‘킹스맨’에서 특수공작원을 꿈꾸는 주인공이 걸친 체크무늬 옷과 모자, 영국 드라마 ‘닥터후’에서 주인공과 함께 모험길에 나선 로즈, 그리고 그녀의 엄마가 곧잘 입는 아래위 핑크색 트레이닝복이 차브의 전형적인 패션이다. 버버리에서 나온 야구모자, 프라다 로고가 찍힌 검정 스니커즈 또한 차브족의 트레이드 마크다. 이런 패션은 그 옛날 테디족의 포마드 기름과 가죽 점퍼, 모드족이 몰던 베스파 스쿠터, 히피족의 꽃, 펑크족의 짙은 화장과 염색처럼 그들 하위문화의 아이콘 구실을 한다. 그런데 형님언니뻘 되는 서브컬처와 달리, 차브족의 패션은 그 누가 차려입은들 태가 안 난다는 결정적 약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씩 따지면 다 비싼 것들인데 절제의 미덕 없이 덕지덕지 걸친 모양새가 꼴불견이 안 된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이런 관계로 차브족이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 측은 아주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매출이 오르는 건 좋은데, 자기네 상표가 가진 값어치가 차브 때문에 떨어지면서 어떤 조치라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버버리와 프라다는 해당 상품을 더는 만들지 않거나 영국 내에서 안 팔기로 결정했다고 한다(그러면 뭐하나, 해외 인터넷 직구가 있는데). 하나 아무리 우스꽝스러운 모양이라도 스타가 저지른다면 유행이 되는 법. 베컴 부부, 리한나, 저스틴 비버 같은 스타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현아나 시엘과 같은 아이돌 연예인들이(아니 내가 볼 땐 그게 차브건 뭐건 알 바 없이 패션·연예 산업이 붙여주고 입혀준) 차브 스타일을 내세우며 등장한 지 오래다.
아무리 드센 하위문화라도 대중에 유행처럼 전달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독한 기운이 옅어지기 마련이다. 펑크족의 기괴한 패션이 핀컬파마와 디스코바지 따위로 기성 상품화된 과거 사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차브들의 못 말리는 패션 가운데 하나가 트레이닝 바지 위에 모내기하듯 양말을 끌어올려 신은 모습이다. 이 또한 조거 팬츠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있다. 나도 이런 바지를 투박한 구두에 항공점퍼와 같이 입고 돌아다니길 좋아하는데, 이것도 차브 스타일의 변종이란다. 여성 2인조 아이코나 팝(Icona Pop)의 ‘아이 러브 잇’이나 펀(Fun)의 ‘위 아 영’ 같은 곡은 꼭 차브들이 아니더라도 요즘 젊은 세대가 ‘떼창’으로 즐겨 부르는 청춘 송가가 되었다.
다 좋은데, 이것도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괜히 멋지게 보이는 거다. 실제로 차브족이 패션의 타락 같은 역기능의 범주 안에서만 놀았다면 이런 이야길 꺼낼 이유도 없다. 5년 전인가, 영국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벌어졌던 폭동의 주범이 차브족으로 밝혀지면서 이들은 영국사회에서 완전히 ‘찍혔다’. 내 생각에도 문제가 심상찮은 건 지금 미국에서 발생하는 흑인폭동이 백인 경찰들의 차별적인 폭력에서 비롯된 결과인 데 반해, 차브가 폭동에 가담한 건 정부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그냥 심심풀이로 나섰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난 세기에 걸쳐 영미권에서 등장한 숱한 서브컬처가 당대에는 문제아 취급을 받았지만, 각자 나름의 믿음이나 문제의식을 통해 예술과 사회운동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점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는 차브족에게 그러한 모습을 기대할 순 없다.
이들이 왜 생겨나게 되었을까? 지금 한국처럼 영국도 한동안 저출산 현상이 큰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그래서 내놓은 정책이 서민이 자녀를 낳으면 머릿수만큼 무제한의 금전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인구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는데, 태어난 애들의 수준은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질이 떨어졌다. 부모들부터 그랬기 때문이다. 과연 이들에게 세금을 퍼부어 더 많은 차브를 만들어내는 게 옳은 일인지에 관하여 영국은 논쟁에 빠졌다. 그리고 우리가 봐온 그대로 ‘위대한 영국의 자존심’과 같은 민족주의 가치에 쉬이 휘둘리는 차브들과 빈곤층은 브렉시트를 앞장서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처럼 고용보장과 공교육이 흔들리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차브족은 단지 남의 일이 아니다.
P&B 아트센터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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