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8] 홀로 산창에 기대니- 이황과 두향(下)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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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9-22   |  발행일 2016-09-22 제24면   |  수정 2016-09-22
밤비에 새잎 나거든
두향, 官妓서 물러나 홀로 초막생활…이황의 3년상 치른 후 뒤따라가
20160922
해마다 두향제를 지내는 장회나루 주차장(단양군 단성면)에서 건너다 보이는 두향묘 주변 풍경. 가운데 솔숲 사이로 두향묘가 살짝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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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이 단양군수 시절 수시로 찾아 심신의 휴식을 취하던 곳의 바위에 친필 글씨로 새긴 ‘탁오대(濯吾臺)’ 암각자. 단양천 상류에 있던 암석이나 지금은 단양읍내로 옮겨 충북유형문화재 제81호로 관리하고 있다.

이황 “매화에 물을 주라” 유언
두향 향한 마음 어땠는지 짐작
후손들, 두향 무덤 찾아가기도

두향 사후에 이황 제자가 제사
단양 단성면 매년 두향제 올려
노산 이은상, 기행문서 넋 위로



이황과 헤어진 두향은 관기의 신분에서 물러났다. 이황을 향한 마음을 순수하게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봄, 강선대(降仙臺)가 내려다보이는 기슭에 작은 초막을 마련한 뒤 이황을 생각하며 홀로 살았다. 이렇게 살아가던 두향에게 21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결국 이황의 부음이 들려왔다.

이황은 1570년 음력 12월 임종하는 날 아침에 “매화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겼다. 매화를 아끼는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게 한다. 이황의 이같은 매화 사랑에는 두향에 대한 마음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이황의 제자 이덕홍은 스승의 임종 순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초여드렛날 아침, 선생은 일어나자마자 제자들에게 ‘매화에 물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오후가 되자 맑은 날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흰 눈이 수북이 내렸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누워있던 자리를 정리하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일으켜 앉히자 선생은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곧 구름이 걷히고 눈도 그쳤다.”

두향은 부음을 듣자 바로 초당을 나서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에 도착했지만, 문상을 제대로 하지는 못하고 멀리서 애도를 한 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황이 별세하자 두향도 목숨 끊어

강선대 위 초막으로 돌아온 두향은 빈소를 차리고 3년상을 치렀다. 3년상이 끝나던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황의 뒤를 따른 것이다. 강선대에서 물에 뛰어들었다고도 하고, 부자차를 끓여 마시고 죽었다고도 한다. 유언은 강선대 아래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강선대 아래에 있던 두향의 무덤은 후일(1984년)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물에 잠기게 되자, 인근 마을 유지들이 의견을 모아 원래 무덤에서 200m쯤 떨어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이 무덤은 해마다 두향제를 지내는 충주호 장회나루 휴게소에서 건너다보면 작게나마 보인다.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강선대는 현재 충주호에 물이 많이 담길 때는 잠기고, 물이 빠지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두향의 무덤 앞에는 두 기의 비석이 있다. 하나는 ‘두향지묘(杜香之墓)’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으로, 뒤쪽을 보면 1984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두향지묘’는 당시 퇴계종가 이동은 종손이 썼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1998년 단성향토문화연구회에서 주관해 세운 비석이다. 두향에 관해 알려진 일반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다.

두향이 죽은 후 이황의 제자인 아계 이산해(1539~1609)가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었다. 이산해는 스승이 아꼈던 두향의 무덤을 대를 이어서 돌보며 제사 지내도록 했다고 한다.

단양 기생들은 두향이 사망한 이후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두향의 무덤에 술 한 잔을 올리고 놀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두향이 세상을 떠난 후 200년 정도 지난 어느 날, 조선시대의 시인 이광려(1720~83)가 두향의 무덤을 찾아 시를 읊었다.

‘외로운 무덤 길가에 있고(孤墳臨官道)/ 버려진 모래밭엔 붉은 꽃 피어있네(頹沙暎紅)/ 두향의 이름 잊혀질 때(杜香名盡時)/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仙臺石應落)’

이황의 10세손 고계(古溪) 이휘영은 밀양부사를 지냈는데, 서울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멀리 단양까지 두향의 무덤을 찾아갔다는 기록이 그의 문집에 나온다. 그의 고손인 한문학자 이가원(1917~2000)은 중년에 두향의 무덤을 찾았다가 봉분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인근 마을 사람에게 부탁해 베어내도록 하기도 했다. 또한 운산(雲山) 이휘재(1795~1875)도 문집 ‘운산집’에 족형(族兄) 이휘영이 두향의 무덤을 찾아 술잔을 올리고 장회 사람 박순욱에게 무덤을 돌봐줄 것을 부탁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두향에 대한 기록으로 조선 후기 문신인 수촌(水村) 임방(1640~1724)이 남긴 시도 있다.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이라네(一點孤墳是杜香)/ 강 언덕의 강선대 아래에 있네(降仙臺下楚江頭)/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芳魂償得風流價)/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 주었네(絶勝眞娘葬虎丘)’

노산 이은상은 1966년 기행문 ‘가을을 안고’에서 두향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다음 시를 지어 기렸다.

‘두향아 어린 여인아 박명하다 원망치마라/ 네 고향 네 놀던 터에 조용히 묻혔구나/ 지난날 애국투사 못돌아 온 이가 얼만데/ 강선대 노는 이들 네 무덤 찾아내면/ 술잔도 기울이고 꽃송이도 바친다기에/ 오늘은 가을 나그네 시 한 수 주고 간다’

◆1987년부터 해마다 두향제 열려

한편 단양군 단성면에서는 1987년부터 매년 두향제가 열리고 있다. 두향의 묘소가 건너다보이는 장회나루 주차장에서 열리는 두향제는 단성향토문화연구회가 주최하고 단양문화원과 단양군청이 후원해 단옷날에 치러오다, 2010년경부터는 단양문화보존회 주관으로 가을에 진행하고 있다. 올해 두향제(30회)는 오는 11월경에 열릴 예정이다. 2015년에는 11월29일에 치렀다.

두향제를 시작할 때 관여했던 단양문화보존회 지성용 회원의 말에 의하면, 당시 단성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이 퇴계종가를 찾아가, 종손에게 두향제의 취지를 설명하며 허락을 구하고 퇴계종가에서도 두향제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이동은 종손은 이황과 두향의 이야기에 대해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부정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으며, 두향제 참석 요청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첫 해부터 세 차례 정도 두향제에 퇴계종가에서도 참석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참석 요청도 하지 않고 참석하지도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요즘은 지자체의 관심이 부족해 제대로 두향제를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아쉬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수년 전 두향제 때 썼던 제문 중 서두 부분이다.

‘삼가 아뢰옵나이다. 지금 강선대에는 오월의 푸르름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손짓하는 이파리에서, 포근하게 산자락을 감싸 쥔 강물에서 당신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가슴으로 뜯었던 가야금, 온몸으로 불렀던 노래들이 다시 살아서 오월의 향기로 피어납니다. 세월은 당신의 꽃 같은 모습을 앗아갔지만 높은 뜻과 지순한 사랑은 여기 모인 사람들 가슴에 남겨두어 오월의 새순처럼 돋아나게 하였습니다. 풀잎 같은 몸으로 온갖 멸시와 짓누름을 사랑으로 승화시킴은 오늘을 사는 저희들에게 무한한 용기를 심어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임과 더불어 사신 모습이 이곳 강선대 절경의 전설이 되어 사랑에 메마른 저희들에게 뜨거운 피가 흐르게 하는 근원이 되었습니다.

두향이여! 저희들 가슴마다 당신의 뜻이 이어지고 닿는 손길마다 당신 같은 사랑이 넘치어서, 온갖 만물과 함께 살며 기쁨은 보태고 슬픔은 나누어 갖는 넉넉한 인간이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이곳이 바로 둘도 없는 좋은 곳인 줄 알고, 이 둘도 없는 땅을 영원히 지켜나가는 떳떳한 자손들이란 걸 깨우치게 하소서….’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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