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영화 ‘밀정’ 이정출役 송강호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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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9-09   |  발행일 2016-09-09 제41면   |  수정 2016-09-09
“내가 출연한 영화 시사회 본 건 ‘밀정’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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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 속에서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교란해야 했던 암울한 192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인 일본 고등경찰 이정출은 친일과 항일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인물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잡초 같은 그는 상관으로부터 의열단의 핵심 정보를 캐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은 이정출을 축으로 의열단의 새로운 리더인 김우진(공유)과의 사이에서 펼쳐지는 암투와 회유 작전을 그린다.


“부족함만 보이니 고통스러워 그랬는데
이번엔 너무 궁금해 큰 맘 용기…볼 만

김지운 감독과 ‘8년 주기’ 네번째 호흡
누구나 밀정 될 수 있었던 시대 담은 작품
전형적이지 않게 시대 비장미 표출 매력
1920년대 조선인 일본 고등경찰로 분해
친일-항일 경계서 외줄 타는 인물 연기

아직도 영화할 때마다 두려워 여러 준비
작품속으로 들어가려고 실전같이 연습”



스타일리시한 김지운 감독의 전작들을 떠올린다면, ‘밀정’에서 먼저 기대되는 건 액션의 스펙터클을 통한 장르적 쾌감일 듯하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은 인물의 정체성 자체에 내재한 서스펜스와 긴박함을 좇아가는 역동적인 드라마에 주목했다. 누구나 스파이가 될 수 있었던 시대의 표정을 담아내는 것이 이미지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다.

송강호는 그런 감독의 의도를 이정출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세심하게 실어 나른다.

“송강호가 위대한 건 그를 쫓아가면 그 시대의 풍경을 보게 된다”는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송강호는 시대의 공기를 담고, 시대를 온 몸으로 겪고, 또 시대의 압박에서 밀려나 경계에 서 있는 이정출이라는 인물의 다양한 감정과 심리를 밀도있게 표출한다.

“괴물 같았어요.” 송강호와 호흡을 맞춘 공유 역시 ‘밀정’에서의 그를 인상적으로 바라봤다. “괴물 같다”라는 말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라성 같은 선배에 대한 경외스러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여기엔 공유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담겨있다. “선배님에 대한 판타지가 좀 있었다. 별도의 연습 없이 즉흥성을 가지고 연기를 할 것만 같았는데 현장에서 대사를 수없이 되뇌는 걸 보고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더라. 반성이 되고 나 역시도 열심히 대사를 중얼거렸던 것 같다.”

‘밀정’은 1923년, 실제로 있었던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토대로 극화됐다. 어두운 시대에 다시 자신의 본령을 찾아가는 사람의 이야기, 그 책임과 윤리적인 의무에 대한 이야기로 말이다. 그리고 송강호는 어느 한 극단으로 쉽게 치우칠 수 있는 캐릭터를 능란하고 절제있게 표현하며 혼란한 시대의 상징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연기적인 한계가 도대체 어디일지 궁금하게 만드는, “역시 송강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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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의 무거움을 담은 만큼 이 작품에 임하는 느낌이 남달랐을 것 같다.

“그렇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 일제강점기는 많은 작품들이 다룬 소재지만 ‘밀정’은 이 영화만의 독창성이 있다. 아픈 시대를 관통했던 많은 분들, 특히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많은 분들의 갈등, 고뇌, 이런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초점이 이 영화의 독창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모습들에 최대한 초점을 맞춰 연기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좀더 매력적이고 입체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일제의 앞잡이였던 이정출은 어떤 계기에 의해 변화된다. 그 과정이 ‘변호인’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건 너무 확대 해석한 것 같다. 물론 ‘밀정’은 이정출의 미세한 마음의 변화와 삶의 태도가 바뀌어가는 게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정출이 ‘이렇게 살아왔습니다’가 아니라 이 시대 회색빛 인간들을 통해 암울했던 시기의 고통과 슬픔, 혼돈의 가치관을 얘기한다. 밀정이 누굴까를 추적하거나 탐구하는 영화는 아니라는 얘기다.”

▶비슷한 맥락인데 이정출이 변화되는 시점에서 개연성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안 그래도 개연성을 지적하는 분들이 많더라. 그가 변화되는 시점이 너무 갑작스럽고 친절하지 않다는 얘기인데, 솔직히 이정출이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에게 술 한잔 얻어먹고 마음이 바뀌었을까. 분명 그건 아닐 거다. 김지운 감독은 그 세계를 거시적으로 다루고 싶었던 것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영화가 이정출이란 인물이 이렇게 살아왔습니다라는 것을 얘기하고자 했다면 이런 식의 접근은 하지 않았겠지. 모든 것을 다 걷어내고 사건이나 상황들을 중심으로 악독하고 악랄한 일제 앞잡이였던 그가 개과천선하는 과정을 담았을 거다. ‘밀정’은 그가 어떻게 변했는지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살아왔다는 것을 반추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점에 나도 동의했다.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정채산의 뜨거운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이정출의 눈빛만으로도 나는 충분한 설명이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김장옥(박희순) 열사가 자결하는 순간을 보게 된 그의 표정에서도 읽힌다. 이런 것들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매력적이고 깊이 있는 얘기를 담았다고 생각한다.”

▶시대만 다를 뿐 미생물처럼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사람은 어디든 존재한다. 듣고 보니 ‘밀정’ 역시 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삶을 보여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쪽으로 해석된다면 좋겠다. 하지만 드라마투르기에 우리가 워낙 익숙하다 보니까 이를 당황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무리는 아니다. 이정출은 평생 그렇게 살아왔던 인물이고 그래서 변절도 쉽게 한다. 다만 기존의 방식대로 일생일대의 어떤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어주고 변한다면 오히려 더 재미가 없었을 것 같다. 마치 박쥐처럼 오늘은 이쪽으로 왔다가 내일은 저쪽으로 가는 게 그 시대에선 나름의 생존법일 수 있고, 정출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감독님과 나는 이런 의도로 영화에 접근했다. 관객들도 그런 식으로 봐준다면 분명 다른 각도에서 ‘밀정’의 독창성과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정출은 아직 평가가 불분명한 황옥이라는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캐릭터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고민이 있었을 듯 하다.

“오히려 평가가 명확했다면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투사들은 평가가 명확한 반면 황옥의 역사적 평가는 지금까지 엇갈리고 불분명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바로 진실에 대한 부담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얘기인데, 덕분에 상상력을 좀더 발휘할 수 있고 창의적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사극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고정된 말투와 행동이 수반되는 만큼 굉장히 경직된 장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무궁무진한 변주가 될 수 있는 장르더라.”

▶김지운 감독과는 네 번째 호흡이다. 그만큼 감독의 색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보니까 감독님과는 8년 주기로 작품을 했더라. 영화 데뷔 즈음부터 20년 정도 같이 작업을 해왔던, 어떻게 보면 영화 선배이자 또 개인적으로 형이자 영화 동지로서 굉장히 남다른 의미가 있는 분이다. 8년 만에 뵈니 전보다 훨씬 더 스타일리시하게 변한 것 같다. 그간 보이지 않게 내공이 쌓인 것 같다. 장르의 변주이든 스타일의 변주이든 이를 멈추지 않고 해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걸 인프라라고 한다면 가히 그쪽에선 최고 등급의 감독이다. 특히 이 작품이 매력적이었던 건 감독 스스로도 얘기했듯 개인의 색채와 연출자로서의 야심보다는 좀더 대중성을 고민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 점이 놀랍고 대단한 것 같다. 전형적이지 않게 시대의 비장미를 다른 방식으로 표출한 점도 좋았다.”

▶최근 실존인물(혹은 이를 연상하게 하는)들을 많이 연기했다. 특별히 그런 인물에 매력을 느끼는 건가.

“그렇진 않다.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 아니면 허구의 인물과 이야기로 편을 나눠 이건 좋고, 이건 싫다라는 건 없다. 그냥 이야기 자체의 매력과 새로움에 대한 것을 중요시하는 편인데 그러다 보니 실존인물을 많이 하게 됐다. 지금 촬영 중인 차기작 ‘택시운전사’도 실존인물이지만 이야기 자체가 중요하게 작용해서 선택했다. 솔직히 실존인물을 연기하는 건 부담스럽다. 오히려 허구의 인물이 덜 부담스럽다. 그런데 이야기 자체가 워낙 소중하고 매력적으로 와닿기 때문에 하게 된 것뿐이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역사물을 좋아한다. 그게 근대사든 사극이든 우리가 거쳐왔던 삶들을 통해 현실의 어떤 지혜를 얻는다든지, 반추하게 되는 그런 느낌의 영화와 이야기를 좋아한다.”

▶영화에서 이정출은 연계순(한지민)의 주검을 보고 크게 오열한다. 감정적으로 많이 이입이 된 것 같더라.

“사실 이정출이 연계순을 보면서 오열하기는 감정적으로 쉽지 않다. 그녀와 어떤 관계의 성립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매력적이었던 게 만약 개연성을 추구했다면 정출은 연계순을 보고 오열하고 고통스러워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연계순은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은유하는 인물이다. 연계순이 죽어 수레에 실려 갈 때 카메라는 그녀의 손을 포착한다. 아주 작고 가냘픈 손이지만 상처와 피가 묻어 있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는 것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가 오열한 것도 연계순에 대한 개인적 연민이라기보다는 그 작은 손 하나도 잡아주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했다는 아픔과 고통의 표현이다. 그건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녀를 고문할 때도 내 민족과 동포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야 한다는 상황이 그를 괴롭게 만든다. 감정이 이입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연기 연습과 준비를 많이 하는 건 연기를 잘하려고 하기보다는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직도 연기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나.

“그건 늘 있는 것 같다. 공유씨도 연기를 본능적으로 할 것 같은데 인터뷰를 보니 수없이 대사연습을 한다고 하더라. 나도 매번 영화를 할 때마다 두렵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와 기술적인 준비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감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건 가만히 있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한다. 스포츠에 그런 얘기가 있잖나. ‘연습은 실전같이 실전은 연습같이’라는.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연기도 연습할 때는 카메라 앞이라고 생각하고 실전처럼 하고, 실전에선 연습처럼 편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노력한다. 다만 준비할 때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매번 자신을 뛰어넘는 것 같은 모습이 신기하고 경외스럽다. 모든 배우가 이를 추구하지만 분명 쉽지 않은 일인데 그 동력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자신을 뛰어넘고 의미를 찾아가는 건 배우의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됐건 그 과정에서 기술적인 측면도 필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진심이다. 나의 진심이 어떻게 전달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 매번 연기를 하면서도 진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여전히 자신이 출연한 작품을 보지 않나.

“정말 고통스럽다. 거짓말이 아니라 배우들 대부분은 그럴 거다. 부족함만 보이니 어쩔 수 없다. 언론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것도 ‘밀정’이 처음이다. 너무 궁금했다. 그리고 차기작 촬영으로 바쁘다 보니 이번 기회가 아니면 못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봉하고 나서 보는 건 더 쉽지 않고. 그래서 이번엔 큰 맘 먹고 용기내서 봤는데 볼만하더라.”(웃음)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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