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42] 한산 나주나씨 가문 ‘한산 소곡주’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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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1-28   |  발행일 2016-01-28 제22면   |  수정 2016-01-28
달싹한 맛에 먹다보면 어느새 취기…과거길 선비 주저앉힌 ‘앉은뱅이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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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소곡주 덧술을 담그고 있는 우희열 명인(왼쪽). 한산 소곡주 전수자인 나장연씨가 직접 만든 누룩을 설명하고 있다. <나장연씨 제공>

조선시대 때 일이다. 과거 보러 한양으로 가던 한 선비가 충청도 한산 지역을 지나다가 목도 축이고 요기도 할 겸 주막을 들렀다. 술을 시켜 한 잔 마셨는데 술맛이 달싹하며 매우 좋았다. 그래서 한 잔씩 몇 잔 더 시켜 마신 뒤 일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일어서려다 바로 자빠졌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일어서기를 포기하고 아예 술을 쭉 더 마셔버렸다. 결국 과거시험장에도 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 선비가 마신 술이 ‘소곡주’였다.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 한산 지역에는 옛날부터 소곡주를 많이 담갔는데, 어느 집 며느리가 술맛을 보느라고 젓가락으로 자꾸 찍어먹다가 자신도 모르게 취하여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은뱅이처럼 엉금엉금 기어다녀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산 소곡주는 ‘앉은뱅이 술’로도 불리었다.

한산 소곡주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백제가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이 주류성에서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소곡주를 빚어 마셨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이 635년 백마강 고란사 부근에서 조정 신하들과 소곡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고, 마의태자가 개골산에 들어가 나라 잃은 설움을 술로 풀었는데 그 맛이 소곡주와 같았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부터 소곡주가 명성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한산 소곡주의 전통을 오롯이 잇고 있는 사람이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의 나주나씨 가문 며느리 우희열 식품명인(78)이다. 우 명인은 현재 아들인 나장연씨 부부와 함께 ‘한산 소곡주’를 빚으며 전통 명주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 천년세월 넘은 소곡주
삼국사기 ‘백제 무왕이 마셨다’ 기록
유민들 나라잃은 설움 달랬다는 설도

◇ 김해김씨 전통주 계승
나주나씨에 시집 온 우희열 식품명인
시어머니 김영신 주조 비법 이어받아

◇ 누룩 적게 사용한 술
메주콩·엿기름·들국화·홍고추 첨가
알코올 도수 18도…달고 점도가 높아


◆ 한산 김해김씨 가문 전통 이은 나주나씨 가문 소곡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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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국가 지정 식품명인 19호로 지정된 우희열 명인의 소곡주 빚기는 한산면 호암리 김해김씨 가문의 소곡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부여가 고향인 우희열 명인은 한산 나주나씨 가문으로 시집온 뒤 시어머니 김영신으로부터 소곡주 빚는 법을 배웠다. 시어머니는 특히 소곡주 빚는 솜씨가 뛰어나서 한산면은 물론이고 서천군 일대에서 잔치가 있는 집이면 언제나 불려가 소곡주를 빚을 정도였다.

김영신은 한산면 호암리 김해김씨 가문의 딸로, 어릴 때(13세)부터 집에서 소곡주 빚는 법을 어머니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어머니는 또 자신의 시어머니로부터 가양주인 소곡주 빚는 법을 전수한 것이다. 김영신이 어릴 때 김해김씨 가문은 부자였고, 그래서 소곡주를 빚어 제주로도 쓰고 손님들에게 접대도 했다. 당시 쌀로 소곡주를 가양주로 빚는 것은 넉넉한 집안이 아니면 어려웠다. 당시 100가구가 넘던 호암리 마을에 소곡주를 빚는 집은 두 집 정도였다고 한다. 호암리는 김해김씨 집성촌이었다.

김영신은 서천의 나주나씨 가문 사람과 결혼을 하는데, 결혼 후 남편이 부인 고향인 한산으로 와서 살게 되고, 김영신은 김해김씨 가문의 가양주 전통을 이어 소곡주를 빚었다. 김영신의 소곡주는 1979년 충남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 작고하면서 며느리인 우희열 명인이 그 자격을 승계했다.

“시어머니는 친정어머니로부터 소곡주 빚는 법을 배웠는데, 일제 강점기와 그 후 한동안은 술 만드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술단지를 이리저리 숨기면서 몰래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든 소곡주는 제사상에 올려졌지요. 시집 와서 보니 시어머니가 추수가 끝나면 항상 소곡주를 빚으셨는데, 저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 백설기와 누룩으로 담근 밑술에다 들국화, 메주콩, 생강 첨가

김영신은 가양주로 빚어오다 1990년 4월 소곡주 제조면허를 얻어 ‘한산 소곡주’라는 명칭으로 본격적으로 소곡주를 생산해 세상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김영신 작고 후 우희열 명인이 아들과 함께 술을 빚어 세상에 출시하고 있다.

이 한산 소곡주는 멥쌀 가루로 무리떡(백설기)를 쪄서 누룩과 섞어 밑술을 담그는 전통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누룩은 통밀을 물에 담갔다가 잘게 부수고 틀에 부어 성형을 한 뒤 한 달 정도 배양해 완성한다.

무리떡에 누룩즙을 적당히 섞어 4~5일 정도 발효시키면 밑술이 된다. 이 밑술에 찹쌀로 고두밥을 쪄서 섞어 덧술을 만든 후 여기에다 메주콩, 엿기름, 들국화, 붉은고추 등 소곡주의 맛과 향을 내는 첨가물을 넣는다. 붉은 고추는 잡귀를 물리치고 부정을 방지하는 주술적 의미도 있다.

이 덧술은 저온에서 100일 정도 숙성시킨다. 옛날에는 땅속에 술독을 묻고 지나친 온도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서 동쪽으로 뻗은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막대기로 자주 저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덧술이 잘 익으면 용수를 박아 맑은 술을 걸러내면 18도의 한산 소곡주가 된다. 물을 타지 않고 원주 그대로 상품화하고 있어 도수가 높다. 짙은 노란 빛깔의 한산 소곡주는 맛이 달며 깊고 부드럽다. 또한 다른 전통 약주에 비해 술의 점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맛이 좋아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마시기가 쉽지만, 알코올 도수가 높아 마시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취하게 된다. 그래서 ‘앉은뱅이 술’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리고 약주인 소곡주를 증류해 43도짜리 소주로도 만들어 출시하고 있다. 이 증류주는 ‘불소곡주’라 불린다.

한산 소곡주의 물은 반드시 한산지역의 물을 쓴다. 한산 건지산 자락의 맑은 지하수는 염분이 전혀 없고 철분이 약간 함유되어 있어 소곡주 담그기에는 최적의 물이기 때문이다.

소곡주는 ‘누룩을 적게 사용해 빚은 술’이라는 의미를 지닌 술 이름인데 ‘소국주(小麴酒)’라고도 불린다. 소곡주에 대한 기록은 ‘동국세시기’ ‘음식디미방’ ‘규곤요람’ ‘규합총서’ ‘역주방문’ ‘양주방’ 등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 10월10일은 한산 소곡주의 날

한때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던 한산 소곡주가 지금은 한산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고 있다. 한산의 한산시장 일원에서는 지난해 10월30일부터 사흘간 ‘100일 간의 정성, 1천500년의 맛과 향’이라는 주제로 ‘제1회 한산 소곡주 축제’가 열렸다. 서천군이 주최한 축제장의 ‘소곡주 카페’에서는 한산면 12개 마을에서 준비한 소곡주 40여 가지를 선보였고, 안주 경연대회와 2년 이상 된 불소곡주를 놓고 벌이는 소곡주 경매도 열렸다. 이 축제에는 12만여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한편 서천군 한산소곡주축제추진위원회는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8일 한산면 무형문화재복합전수관에서 서천군수를 비롯해 소곡주 생산 주민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0월10일, 한산 소곡주의 날’ 선포 및 제막식 행사를 가졌다. 10월10일을 ‘한산 소곡주의 날’로 정한 것은 한산 소곡주의 숙성 기간이 100일인 점과 우리 조상들이 결혼 100일을 맞아 합환주로 소곡주를 나눴던 의미를 담아 월과 일의 수의 곱이 100이 되는 날이 10월10일이기 때문이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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