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혜 신라문화유산연구원 학술연구팀장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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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1-22   |  발행일 2016-01-22 제37면   |  수정 2016-01-22
“백결 선생이 연주한 그 악기…경주엔 가야금 이전에 신라금이 있었다”
김성혜 신라문화유산연구원 학술연구팀장
선행 연구가 거의 없어 연구 영역 개척이 상대적으로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신라음악사 연구에 새로운 기틀을 마련한 김 성혜 팀장. 그는 장경호에 수놓인 주악상 등을 깊게 연구하며 통일 이전 신라 악기의 존재를 최초로 밝혀내 학계에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처용무는 물론 최근에는 신라고취대에 이어 향발무 등 ‘신라십무’ 복원에도 주력하고 있다.

조선의 유교문화 속에서 석간수처럼 이어져온 신라의 문화예술. 천년 고도 경주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인데 찾아보면 ‘오리무중’인 경우가 많다.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것 같다. 상당수 관광상품화된 경주의 인문학적 인프라를 신라와 동일시하려고 하는 건 모순이다. 현대와 관련된 것만 찾아모으면 그것은 ‘반신라적인 처사’다. 다양한 문화관광상품을 역사스토리텔링으로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무대에 선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배려해야 될 대목도 적잖다.

 

갑자기 신라의 속살, 신라의 원형이 뭔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지난주 경주시가 출연해 만든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의 숨은 일꾼 김성혜 학술연구팀장을 만났다. 그녀의 말투는 참 정감 있고 투박하다. 화장기를 멀리한 표정은 삼베보자기 톤이다.

 

신라에 대한 연구 인프라가 척박한 현실, 실낱 같은 유물을 통해 전인미답의 신라음악 복원에 나선 김 팀장. 그녀의 연이은 연구 덕분에 경주는 더욱 탄탄한 역사문화 콘텐츠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기반 위에서 지난해 ‘신라 고취대’가 탄생할 수 있었다. 연구가 유일한 취미이자 낙인 그녀는 모임도 없다. 심지어 동기회·동창회도 가지 않는다. 신라에 빙의된 그녀를 통해 더 깊은 신라문화를 만날 수 있었다.

국보 195호 토우장경호 상단에
붙어 있는 주악상 현악기 분석
신라금의 존재 발표해 큰 반향

본고장 경주의 처용무 부활
신라고취대·악기 복원에 앞장

향발무 등‘신라십무’재현 필요

'신라토우속의 음악과 춤' 펴내
문체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

역사속 신라는 개방적이고 다양
'신라'에만 몰입된 경주 아쉬워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어떤 기관인가.

“2004년 경주시에서 출연한 기관이다. 도심을 개발하거나 도로확장 등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시굴과 발굴이다. 통상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업무를 관장했는데 업무 효율성을 위해 별도의 발굴기관으로 생겨난다. 2009년 신라문화유산조사단이었다가 2009년 연구원으로 확대개편된다. 나는 학술팀을 이끌고 있는데 발굴을 하면 관련 유물을 중심으로 학술대회도 하고 2007년부터 고도신라학 국제학술대회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경주에는 역대로 신라학 전문가가 적잖이 활동했는데 그 중에서도 작고한 윤경렬 선생의 업적이 대단했던 것 같다.

“고청(윤경렬) 선생은 1940년대 월남해 경주로 오셨다. 6·25전쟁 직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박물관 어린이학교’를 경주에 만든다. 정말 획기적인 분이다. 당시 문화재 교육은 공교육에서는 전무한 상태였다. 나도 그 어린이학교에 입학했다.”

▶고청의 생각은 이후 어떻게 경주문화에 반영되는가.

“윤경렬 현상은 경주에서 이후 두 가지 갈래로 발전된다. 그 중 하나가 50년대 생긴 신라문화동인회다. 회장은 고청이었다. 그 흐름을 받아 전승한 사람이 김윤곤 전 한림학교 교장이다. 고 이근직 교수(경주대) 중심으로 1994년 스터디모임이 생기고 후에 경주학연구원(원장 박임관)으로 이어진다. 한편 동인회를 발판으로 해 경주시청 공무원 출신 김구석씨 주도로 남산연구소가 설립된다. 그 뒤 신라문화원이 태동한다.”

▶신라문화제도 신라의 전통 계승에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62년부터 경주시는 신라문화제를 매년 개최해왔다. 이 신라문화제를 개최할 때마다 콘텐츠 개발이 여간 고민이 아니었다. 70년대는 신라문화동인회를 이끈 고청 선생이 총괄기획을 했다. 70년대 말 동국대 경주캠퍼스가 생긴다. 전문가들이 등장하면서 학술연구 분야를 맡기려고 만든 게 신라문화선양회다. 선양회에서 학술적인 파트를 담당하는 모임이 경주 동국대 부설 신라문화연구소다.”

▶신라와 경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관련 책자가 발간됐는지 궁금하다.

“3년 용역으로 경북도가 출연한 ‘신라사대개’가 총 30권 한 질로 곧 출간될 예정이다. 경북대 주보돈(신라사)·이희준 교수(신라고고학)와 퇴임한 계명대 노중국 교수(국내 백제사 최고 권위자) 등이 경주와 신라에 관련된 인문학적 콘텐츠를 총망라한 것 같다. 나는 신라 음악 파트를 집필했다.”

그녀가 2006년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은 ‘삼국시대 신라음악사 연구’. 지금까지 음악사 연구에 있어, 특히 통일 이전 신라음악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 학계에서는 ‘통일신라 이전에는 음악자산이 거의 없었고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와 백제, 특히 가야의 음악을 흡수하면서 신라음악이 형성됐다’고 보고 있었다. 97년 자신의 연구 인생에 한 획을 긋는 전시를 만나게 된다. 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토우특별전’이었다. 유물을 자세히 음미했다. 그런데 유물에 신라음악에 대한 단서를 풀 수 있는 장식물이 붙어 있었다. 경주 계림로에서 73년 출토된 토우장경호(국보 195호) 상단에 현악기 주악상이 붙어 있었다. 이 악기에 대한 판독을 위해 가야금 명창 황병기 등에게 자문한 결과 가야금으로 판명났다.

김성혜 신라문화유산연구원 학술연구팀장
▶기존 학계의 가야금에 대한 입장이 궁금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2년조를 보면 가야국의 우륵이 그 제자 이문과 함께 551년 신라에 투항을 했다. 투항과정에 가야금이 신라에 전해졌다는 게 학계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장경호 주악상의 제작 연대를 밝히는 게 급선무였다.”

▶고난도 연구과정이었겠다.

“맞다. 신라토기 연구에 올인한다. 분석 결과 주악상 제작 연대는 350~500년이었다. 결국 주악상이 신라통일 이전의 신라악기라는 걸 알아냈다. 연이어 삼국 시절 백결·물게자 선생이 연주했다는 악기의 실체가 궁금했다. 학자들의 설도 가야금과 거문고로 나눠졌다. 나는 ‘이것은 가야금 유입 이전의 신라금’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관련 사료를 찾았는가.

“찾았다. 삼국사기 열전 백결선생 편, 삼국사기·삼국유사 물게자조를 보면 그 금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5세기 중반의 사람인 백결선생은 낭산(경주시 배반동) 아래 살았다. 가세가 빈곤하여 세모가 되었지만 방아 찧을 쌀이 없었다. 그 아내가 한탄하니 백결선생이 금을 연주해 방아소리를 냈다.’ 그때 연주한 금을 난 ‘신라금’이라고 본다. 그 백결의 금이 장경호에 올려진 현악기라고 봤다. 가야금은 가야에서 온 금이다. 그렇지만 신라금은 기록할 때 굳이 신라금이라고 기록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98년 충북 영동 난계 국악학술대회장에서 발표를 했다.”

▶학계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겠다.

“신라통일 이전 신라악기에 대한 최초의 주장이라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토우 주악상 관련 모두 4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98년 현악기, 99년 관악기, 이 두 논문과 관련 이해구학술상운영위에서 제2회 이해구학술상을 받게 된다. 2000년 비파, 2003년 가무에 관련된 저서도 펴낸다. 그걸 다 묶은 게 2009년 민속원에서 펴낸 ‘신라토우속의 음악과 춤’이란 단행본이다. 이듬해 그 책이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다.”

연구가 깊어지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다. 이때까지는 음악공부를 위주로 했는데 신라고고학에 더 치중한다. 경주학연구모임에도 간여하고 박물관대학에도 입학해 매주 일요일 1년간 답사를 다녔다. 토우에 이어 석탑, 부도, 범종 등에 나타난 주악상도 추가 연구한다. 2005년 박사학위를 받고난 뒤 통일신라음악사 연구에 돌입한다. 그러면서 기와를 더 공부한다. 신라시대 전돌에 나타난 비파상, 문경 봉암사, 구례 연곡사, 전남 화순 쌍봉사 부도 등에 나타난 주악상을 연구한다. 신라음악사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고구려·백제·가야음악도 연구한다.

특히 1993년 백제 대향로에 꾸며진 주악상, 2007년 광주 신창동에서 출토된 목재 현악기 등을 토대로 2009년 ‘삼국시대음악사연구’란 연구서를 출간한다. 신라음악과 중국음악의 관계를 알기 위해 2002년 중국 베이징 등지로 현장답사를 떠난다. 고서와 골동품의 메카인 베이징 근처 리우리창에서 ‘중국음악사도감’을 접한다. 이 책의 특징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출토된 음악관련 유물을 도록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 360위안(8만원)에 사온다. 물론 국내에는 없었다. 중국어라 직접 해독이 어려웠다. 후배 조선족인 김홍련씨의 번역 도움을 받는다. 그녀는 부품 전문용어를 몰라 서로 도와가면서 번역하는 데만 1년이 걸리고 윤문에 또 1년이 걸려서야 해석판을 펴낼 수 있었다. 실력을 인정받아 한국음악사학회(학술진흥재단 등재지) 편집장을 맡지만 잡무에 시달려 2008년 물러나 연구에만 올인한다. 다시 부산대 한문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 조선음악사를 연구한다. 3년간 조선왕조실록을 정독한다. 인터넷에 들어가 음악관련 기사를 다 발췌했다.

드디어 처용무에 꽂힌다. 처용무는 신라 49대 헌강왕(875~886) 때 처용랑 설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춤으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궁중무다. 처용무의 음악과 무용, 의상과 탈의 제작방법 등은 조선 9대 성종(1493년) 때 편찬한 ‘악학궤범’을 기초로 하여 전승·보존되고 있다. 62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신라문화제 때 고유제 성격의 서제(緖祭)를 지내게 되는데 이때 처용무를 봉헌한다. 2009년 처용무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다. 처용가의 출발이 경주이고 그래서 처용무가 생겨났다. 처용무의 본고장은 경주인데 외지인이 처용무 추는 게 보기가 좋지 않았다. 경주 주도적 처용무를 만들고 싶었다. 2012년 일주일에 세번씩 사람을 불러 처용무를 가르쳤다. 의상비, 탈제작비 등이 문제였다. 의상 한 벌에 200만원, 탈도 한 개 200만원, 모두 2천만원이 필요했다. 그런 시점에서 경주시가 도움을 줬다. 지난해 처용무보존회가 경주에서 처음 생긴다.

▶신라고취대까지 복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4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담종, 담고, 담징, 대각(목고동), 나, 중행고, 소행고, 동발(바라) 등 모두 8종의 신라악기를 복원했다. 악기별 무형문화재를 수소문해 만들었다. 징과 종 문양은 고청의 아들인 윤광주씨(고청기념관 대표)가 담당했다.”

▶취타대와의 차이점은 뭔가.

“취타대는 태평소, 나각, 용고, 운라 등이 축을 이루는데 신라고취대는 담종, 담징 등이 특징이다.”

▶향후 뭘 더 복원하고 싶은가.

“처용무, 고취대에 이어 향발무, 아박무 등 ‘신라십무’를 재현할 필요가 있다. 20년간 유물에 나타난 도상자료를 좀 갖고 있는데 아무튼 신라십무는 1년에 2개씩 재현해도 5년이 걸린다. 숱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향후 꿈과 과제는 뭔가.

“두 가지다. 연구자로 후학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유물 중심 그림으로 보는 한국음악사, 유물로 보는 한국음악사 도록을 내는 것이다. 박물관과 연계해 특별전 등을 하면 대중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 같다.”

▶경주와 신라를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은.

“역사 속 신라는 매우 개방적이고 다양했고 통섭적이다. 현재의 경주는 편협하고 자유롭지 않다. 신라에만 몰입이 돼 진취적인 부분이 좀 아쉽다. 경주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신라인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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