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맛있는 이야기 .8] <끝> 또 다른 지역대표 메뉴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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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2-29   |  발행일 2015-12-29 제13면   |  수정 2015-12-29
납작만두·닭똥집튀김·사찰비빔밥…전국 명성의 향토 먹거리 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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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대명동 안지랑곱창골목과 함께 대구 안주의 양대산맥인 동구 평화시장 닭똥집골목 초입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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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식 칭기즈칸 요리 1번지로 유명했던 동아백화점 옆 대구회관의 명맥을 잇는 미래징기즈칸의 대표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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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두사에 한 획을 그은 식물성 만두소가 인상적인 납작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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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비빔밥에 도전장을 낸 사찰음식 고장 달성군의 명물 음식인 사찰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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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식 육회와 함께 쇠고기 별미요리로 유명한 대구식 육회인 ‘뭉티기’.


스토리브리핑

대구십미(大邱十味) 외에도 대구에는 빛나는 아우라를 발산하는 사각지대 메뉴가 많다. 평화시장 ‘닭똥집 튀김 거리’도 그렇고 여름에 절정을 맞는 달성군 가창군 우록리 화담식당의 염소고기, 낮에는 시장이고 밤에만 형성되는 칠성시장 해물포장마차와 장어 거리는 북성로 돼지불고기 골목과 의형제다.

대구는 한때 한강 이남 최고 ‘제빵의 고장’이었다. 단팥빵의 전설인 ‘수형당’의 저력은 현재 윈도베이커리 빵 중 가장 불티나게 팔리는 시내 삼송베이커리의 ‘마약빵’으로 이어졌다. 대구는 전국 최고 커피와 차의 고장이다. 인구 비례 바리스타가 가장 많고 차 사범도 전국 최고다. 특히 대구는 ‘숯불갈비의 고장’이기도 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형성된 불고기문화, 60년대 대신네거리 근처에서 형성된 갈비문화는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찜갈비·돼지불고기 붐으로 연결되고 급기야 80년대 삼겹살 시대로 이어진다. 90년대로 접어들면 지역의 쇠고기 등심문화는 수성구 만촌동에서 생긴 ‘비원’(현재 안압정으로 옮겨감)에 의해 갈빗살 신드롬으로 발전한다. 숯불갈비는 너구리·묵돌이·녹양·송죽·극동 등의 인기 메뉴인 뭉티기, 영천 영화식당에서 발원해 대구 편대장에서 증폭된 ‘육회’와 세트로 대구발 숯불갈비 인프라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또한 대구발 칭기즈칸 요리의 1번지 대구회관의 명맥을 잇는 옛 아시아극장 옆 골목에 있는 ‘미래’, 전국 첫 사찰비빔밥의 신지평을 연 ‘달성군 사찰비빔밥’ 등도 지역민이 기억해야 할 대구의 자산이다.

냉면집은 대동면옥과 부산안면옥이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 ‘큰나무집’은 하절기 시간당 가장 많은 궁중닭백숙을 파는 집으로 유명하다. 이 밖에 백반집의 전설은 중구 서성로 ‘태화식당’.

◇납작만두
돼지비계 대신 당면·부추 넣어 빚어
식물성 만두소로 한국 만두사 한 획

◇닭똥집골목
곱창골목과 이색 술안주 거리 ‘쌍벽’
평화시장 언저리 업소 수십곳 성업

◇커피
커피명가·다빈치·핸즈커피 등 6곳
대구발 프랜차이즈 스타일 커피숍

#1. 웰빙만두의 선두주자 납작만두

1963년 대구에서 한국만두사의 한 획을 긋는 새로운 버전의 만두가 탄생한다.

다른 지방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납작만두’다. 대구에서는 ‘납작만두’라고 하지 않고 ‘납딱만두’라 불러야 제맛이다. 납작만두는 ‘대구 분식의 해결사’다. 동물성 만두소 시대에서 식물성 만두소 시대를 연 기념비적 만두로 받아들여진다. 지역민은 그런 만두가 있다 하지만 서울·경기권은 물론 외국 관광객에게는 ‘별미만두’로 어필됐다. 좀더 작게 빚어 ‘대구의 라비올리(만두처럼 생긴 이탈리아 파스타의 일종)’로 홍보해도 좋을 듯싶다.

납작만두 얘기를 하려면 삼국지의 지장(智將) 제갈공명을 등장시켜야 한다. 제갈공명이 남만 정벌을 끝내고 위수 앞에 도착했을 때 거센 풍랑이 일었다. 용신이 나타나 “49명의 머리를 바치지 않으면 강을 건널 수 없다”고 했다. 제갈공명은 병졸들에게 밀가루로 사람 머리 모양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제갈공명은 그걸로 제를 지내 무사히 도강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제갈공명이 만든 용신을 속인 ‘두병(頭甁)’을 훗날 ‘만두(饅頭·만터우)’라 불렀다. 중국에는 교자·춘권 등 만두류를 총칭해서 ‘딤섬(點心)’이라 한다. 이들 만두류 간단하게 구분하면 찐만두(蒸餃)인 ‘교자만두’, 샤오롱바오(小籠包) 같은 ‘포자만두’ ‘사오마이(燒賣)’ 그리고 소가 없는 만두 종류인 ‘만터우(饅頭)’, 스프링롤인 ‘춘권(春捲)’ 등으로 나뉜다.

대구발 납작만두는 둥그렇고 달걀만한 만두를 밀쌈전병 같은 납작한 반달 모양으로 ‘편곡’했다.

대구 납작만두 3인방부터 찾아보자.

미성당파, 교동시장파, 남문시장파로 삼분된다. 이 셋은 한결같이 만두소에 돼지비계를 넣지 않고 당면·부추 등으로 소를 빚는다. 국내에서 가장 간단한 만두소다. 셋의 차이는 만두피의 두께. 가장 두꺼운 곳은 남문시장 안에 있는 남문 납작만두, 가장 얇은 곳은 교동시장 납작만두. 셋 중 미성당이 납작만두의 맏형격. 초창기에는 돼지기름을 사용해 지금보다 더 구수한 맛이었지만 돈지파동을 겪으면서 지금은 식품위생법상 식용유만 사용하게 돼 있다.

납작만두도 진화했다. 서문시장 1지구 초입 계단 아래 포장마차 같은 ‘허둘순 삼각만두집’은 납작만두에 도전장을 내 푸드블로거 팬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반달형 대구식 납작만두를 또 한번 ‘삼각형’으로 변주했다. 방송인 박철씨가 SBS 음식코너 전국 맛투어를 할 때 이 집을 전격 소개하면서 대박이 난다. 초창기 서문시장 폭력배 조직원이 자리를 뺏으려고 했지만 허 할매는 부산 자갈치아지매 이상의 억척스러움으로 배수진을 치는 바람에 나중엔 조폭들도 인정한 할매가 된다.

납작만두의 응용은 의외로 폭 넓다. 대구시청 근처의 아바이 순대, 매콤하기로 유명한 신천시장 내 떡볶이, 대백 옆에서 태어난 매콤 양념어묵과 중앙분식의 야키우동, 남구 이천동 진흥반점의 짬뽕·짜장면 등과 매치해도 재밌는 궁합 메뉴가 될 것 같다.



#2. 평화시장 닭똥집튀김 거리

대구십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남쪽의 안지랑 곱창골목과 함께 이색 술안주 양대산맥으로 유명한 골목이 있다. 바로 동구 신암1동 파티마병원 서쪽 평화시장 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닭똥집 골목’이다.

시장 언저리는 일제강점기 포항~영천~동촌~아양교~칠성시장으로 연결되는 신작로변. 큰 건물이라고는 1930년쯤 대구공립직업학교로 출발한 대구공고뿐이다. 69년 동대구역이 허름하게 영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인근에 주택가가 조금씩 형성된다. 72년 도계업을 겸한 ‘삼아통닭’이 나타난다. 삼아는 ‘닭똥집 골목’의 산파역. 그 무렵 아침마다 평화시장 앞거리에는 인력시장이 섰다. 부부는 막노동꾼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싸게 먹을 수 있는 술안주를 개발했다. 그렇게 해서 포항치킨, 꼬꼬하우스, 똥집본부, 평화통닭, 제일통닭 등이 ‘1세대 닭똥집’으로 자리를 잡는다.

90년대 중반쯤엔 업소가 무려 58개로 폭증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원조집이 모인 광장형 골목에 손님이 몰렸다. 하지만 95년부터 골목 상권이 양분된다. 경북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때 중구 공평동 밀리오레 동편 골목에서 문인들을 위한 카페 시인을 운영했던 김은희씨가 차린 ‘아가씨와 건달들’ 때문이다. 비로소 ‘신세대를 위한 닭똥집’ 시대가 개막된다.

#3. 대구의 차와 커피 이야기

커피와 차. 대구 와서 이걸 자랑하면 본전도 못 찾는다. 도처에 전문가다.

많은 이들은 대구가 차의 명가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전국 차 사범 중 상당수는 대구 출신. 대구에서 처음으로 차인들이 조직적으로 모이게 된 것은 78년이다. 토우 김정희와 모산 심재완 박사가 그 축이 된다. 이때 다농 이정애 종정다례원 명예이사장과 석성우 스님 등이 합류했다. 차 붐이 일게 된 건 76년 효당 스님이 독서신문에 차에 관한 글을 기고한 뒤부터. 구산 최정수 홍익차문화연구원장, 이정애 종정다례원 원장, 배근희 청백다례원 이사장, 작고한 최혜자 은정차회 회장 등이 지역 차문화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특히 영남차회는 대구의 대표적 다인들의 모임이다. 영남의 대표적 차회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영남차회가 발족하게 된 것은 이러한 구산과 더불어 당시 ‘양(兩) 정수’라 불리던 태평양화학의 예정수씨, 그리고 현재 초암차도 진흥협회를 운영하고 있는 이욱형씨 등이 힘을 합친 덕분. 86년 7월 능인고에서 영남지역 차인 80여명이 모여 ‘영남차회’가 발족된다. 당시 영남차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지역 문화인사가 아니란 말까지 나돌았다.

대구의 첫 전통찻집은 82년 무궁화 백화점 내에 모습을 드러낸 ‘여천다원’. 2002년 9월 만촌동에 들어선 다천산방은 퓨전찻집의 리더다.

70년대는 인스턴트 커피의 시대. 동서식품은 ‘맥스웰 하우스’를 시작으로 커피시장을 장악했고, 76년에는 커피 역사상 획기적인 발명품인 ‘커피믹스’가 등장한다. 설탕:프림:커피(3:2:1)로 절묘하게 섞은 커피믹스는 다방커피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 스타일이 가장 유행한 곳이 바로 대구란 설도 있다. 78년은 커피 자동판매기가 첫선을 보인 해다. 80년대는 원두커피의 시대. 국내 커피 전문가들이 로스팅과 핸드 드립에 눈을 뜨게 되는 태동기다. 99년 이화여대 앞 스타벅스 1호점이 개점하게 된다.

대구의 첫 한국인 다방은 1936년쯤 아카데미 극장 옆 골목에서 대구가 낳은 천재화가 이인성이 연 ‘아루스’였다. 80년대 음악다방 전성기를 거치면서 다방커피는 막을 내리고 커피숍 원두커피 시대가 열린다.

현재 대구발 6인방 프랜차이즈 스타일의 커피숍이 있다. 바로 커피명가, 다빈치,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 더 브릿지, 핸즈커피, 모깜보 등이다. 대구 커피의 탈근대화는 커피명가 안명규씨로부터 시작된다. 88년 7월 경북대 북문 커피명가 앞에는 드물게 장사진을 쳤다. 과감하게 ‘절대금연’까지 실시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공동기획: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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