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9] ‘한족마을 내 경상도마을’ 흑룡강성 하얼빈시 홍신촌

  • 노인호
  • |
  • 입력 2015-10-21   |  발행일 2015-10-21 제5면   |  수정 2022-05-19 09:57
갖은 설움 이겨내고 독립한 우리마을…34년 만에 漢族에 넘어갈 판
[디아스포라 .9] ‘한족마을 내 경상도마을’ 흑룡강성 하얼빈시 홍신촌
노인회관에 걸려 있는 홍신촌을 만들 당시 노인들의 기념사진. 사진에는 70명가량이 있지만, 현재는 10명도 채 남지 않았다.
[디아스포라 .9] ‘한족마을 내 경상도마을’ 흑룡강성 하얼빈시 홍신촌
조선족 경상도 마을 홍신촌 입구에 한글로 적힌 도로 표지판과 김영삼 전 대통령 방문 기념석.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한글 사용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디아스포라 .9] ‘한족마을 내 경상도마을’ 흑룡강성 하얼빈시 홍신촌
홍신촌에 단 하나뿐인 2층집 전경. 지금은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한국으로 떠나 비어 있는 상태지만, 한국에서 쓰던 가마니 짜던 기구, 한국에서 가져 온 짚신, 흙 등이 전시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중국 내 또 하나의 경상도 마을인 흑룡강성 하얼빈시의 홍신촌.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 차를 몰았지만, 한족 마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승용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가기 힘들 정도의 마을길을 5분 정도 달려가자 ‘단결로’라는 한글 표지판이 나왔다. 홍신촌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유일한 표시다. 만주족과 한족이 모여 살던 마을 안에 조선사람, 그 중에서도 경상도 사람이 모여 조선족 마을을 만든 뒤 독립해 이들 마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규모도 작아 마을 전체를 돌아보는 데 걸어서 30분 정도면 충분했다.

1954년 버려둔 습지 등서 농사
시세보다 더 주고 땅 구입 합심
1981년 지금의 ‘홍신촌’ 독립
주민 돈벌러 떠나며 빈집 속출
소학교 폐교 배추밭 된 지 오래

한족 유입에 정체성 잃을까 고심
마을회의 “우리 것 지키자” 다짐
빈집 사들이고 곳곳 한글 표지판
매년 마을잔치로 전통문화 계승

◆한족마을 내에서 독립한 경상도마을

일제강점기 경상도 사람들이 중국으로 쫓겨온 것은 1930년대쯤.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가속화되면서 이들은 등에 솥을 지고, 이불 정도만 챙겨 고향을 등져야 했다. 그렇게 중국에 왔지만, 먼저 넘어온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이 두만강 인근을 차지해 지금의 길림과 흑룡강까지 오게 됐다.

홍신촌이 있는 하얼빈시 아성(阿城) 일대는 원래 만주족이 모여살던 곳이다. 이곳에 한족이 대량으로 유입돼 2개의 민족이 어울려 살았다. 여기에 1954년 경상도 출신 조선족이 찾아 왔고, 한족이 버려둔 저습지와 상습 침수지대에서 농사를 시작했다.

조금씩 벼농사를 시작했고, 한족들에게 시세보다 2~3배 많은 돈을 주고 땅을 사들였다. 그렇게 만주족과 한족이 뿌리내리고 있던 마을 안에 ‘경상도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고, 1981년 독립해 지금의 ‘홍신촌’이 됐다.

지난달 20일 찾은 홍신촌은 오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2시간가량 마을에 머물면서 만난 조선족은 고작 6명이었다.

“어데 갔다 오노.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싱크대 좀 고치도.” “알겠습니더. 저녁에 장비 챙기가 가께예.”

이곳에서 가장 젊은 노상국 공산당 회계(43)가 지나던 한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오가는 사람은 적었지만, 이들은 경상도 사투리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마을의 거리는 물론 비어있는 집들도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다. 마을이 깨끗하게 유지되는 이유는 얼마 남지 않은 어르신이 후손에게 깨끗한 마을을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집뿐만 아니라 골목 구석구석을 늘 쓸고 닦고 있어서다.


◆급격하게 줄어든 조선족 사람들

잘 가꿔진 농촌 마을이고 부농도 적지 않지만, 상당수가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나 한국으로 떠나면서 빈집이 속출하고 있다. 그렇게 집이 비어가다 보니 이곳에서 어린 학생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홍신소학교는 1997년 문을 닫았고, 운동장은 배추와 옥수수 밭으로 변해버렸다.

변영철씨(68)는 “처음에는 남편이, 다음에는 아내가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나 한국으로 떠나다 보니 아이들만 남겨진 경우도 적지 않다”면서 “학교도 없어져 아이들만 있는 경우 인근 도시로 떠나게 되고, 나이든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빈집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조선과 경상도 사람의 정체성 유지

빈집이 늘어나면서 걱정도 함께 늘어났다. 원래 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한족들이 홍신촌의 집을 탐내고 있는 것. 한족 마을보다 잘 가꿔져 있고 관리도 잘 되어 이들이 가장 사고 싶은 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인근의 한족들이 쉴 때는 이곳을 찾을 정도다. 따라서 홍신촌 사람들은 집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1가구 다주택자의 길을 택하고 있다.

마을 안에서 개고기 식당을 운영하는 손학철 공산당 서기(58)도 그중 한명이다. 한족에게 조선족 집을 넘기지 않기 위해 불가피하게 식당을 확장했다.

손 서기는 “최근 손님이 줄면서 식당을 확장할 필요는 없었지만, 한족이 홍신촌에 들어오게 되면 그동안 지켜온 조선민족의 정체성은 물론 경상도 문화도 무너지게 되고, 결국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손 서기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조선족들은 봄과 가을 한 차례씩 마을 회의를 통해 이런 마음을 다지고 있다.

올 초에는 이 마을 주요도로인 우의로, 경순로, 단결로, 홍남로 등의 도로 표지판에도 한글을 함께 적어 넣었다.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매년 한 차례 이상 이곳에 살던 조선족이 한곳에 모일 수 있도록 잔치를 벌이고 있다. 올해도 지난 8월30일부터 이틀간 인근 조선족 중학교인 아성중학교에서 씨름, 줄다리기, 널뛰기 등의 한국 문화를 나눴다.

손 서기는 “홍신촌은 늦게 만들어진 경상도 마을이지만, 이 문화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작지만 지속적인 활동을 해나갈 것”이라면서 “같은 민족인 한국에서도 관심을 더 가져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중국 하얼빈시에서 노인호기자 sun@yeongnam.com

▨도움말=<사>인문사회연구소 신동호 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