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표성흠의 캄보디아 편지] 삼보 프레이 쿡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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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9-11   |  발행일 2015-09-11 제39면   |  수정 2015-09-11
머리·팔 없는 시바신상의 아름다움은 미켈란젤로 조각상과 견줘도 손색없다
[소설가 표성흠의 캄보디아 편지] 삼보 프레이 쿡을 가다
팔과 머리가 잘려나간 시바신상.
[소설가 표성흠의 캄보디아 편지] 삼보 프레이 쿡을 가다
삼보 프레이 쿡의 대성전.
[소설가 표성흠의 캄보디아 편지] 삼보 프레이 쿡을 가다
천년의 다리.
[소설가 표성흠의 캄보디아 편지] 삼보 프레이 쿡을 가다
사원을 통째로 삼켜버린 나무.


‘삼보 프레이 쿡’은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에서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잇는 6번 도로상의 캄퐁 톰에서 34㎞ 북쪽에 위치해 있다. 앙코르와트가 건설되기 훨씬 이전인 6세기경에 이사나 바르만 왕이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시대에 바바 바르만 왕은 삼보 프레이 쿡이 있는 이 지역, 바바 푸라에 정착하여 작은 나라를 건설하였다. 598년 바바 바르만이 사망하고 그의 동생 시타라세나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이사나 바르만(611~616년)이 왕위를 이어받아 이사나 푸라(Isanapura·이사나의 도시)를 건설하였다. 지금의 프레이 쿡은 원래 ‘이사나 푸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첸라의 수도 자리다. 정글 속에 파묻혀 철저하게 파손된 모습이지만 아직도 100여 사원의 잔해가 남아 있다. ‘이사나’라는 말이 시바신의 또 다른 이름인만큼 이 사원이 시바 신에게 헌정되었음은 자명하다.

가장 주된 건축물은 프라삿 삼보로 시바의 여러 모습 중 하나인 감바레시와라(Gambhireshvara)에게 봉헌된 사원이다. 다른 사원들은 다 시바 신 자신을 위한 것인데 왜 유독 이 건물만 감바레시와라에게 바쳤을까. 감바레시와라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궁금증을 일게 하는 곳이다. 또 다른 탑 안에 시바신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람 크기 등신대 조각상이 하나 있어 이 인물이 감바레시와라의 현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도 한다. 얼굴과 팔이 떨어져나갔지만 그 늘씬한 체구가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에 견주어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선이 출중하고도 아름답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된 신상은 링가와 요니로 다산에 대한 염원의 기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한다. 실제로 나는 이 신상 앞에서 이상한 현상의 사진 한 장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찍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한 프랑스 관광객의 아랫도리 속살이 훤히 비치는 사진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옷을 얌전히 차려 입고 있었는데 앙코르와트의 속살 비치는 비단옷을 입은 압사라처럼 투시되어 나타난 신비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삼보 프레이 쿡은
첸라의 수도 자리
정글 속에 파묻힌
100여 사원 잔해

가장 큰 사자사원
붉은 벽돌로 쌓아
입구엔
뒷다리에 힘 주고
갈기세운 사자상
전생 승리 기원한
국가기도처 일종

문설주 위 조각상
회반죽으로 만든
견고한 조각틀에
1천년이 지나도록
온전하게 남아


신화는 민간전승의 정수를 모은 총결집이다.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흐지부지 맥이 끊어진다. 전승되지 못하는 신앙은 사교다. 참이 아니다. 보편타당성을 지녀야 지지를 받을 수 있고 계승될 수 있다. 그러한 주제라야 신화를 완성시키게 된다. 삼보 프레이 쿡이야말로 앙코르와트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전범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일부 사람들이 앙코르와트의 모델이라고 보는 프레아 코가 있는 룰루오즈 유적군보다도 200년이나 앞선다. 대표적 건축물인 프라삿 삼보는 중앙탑을 위시한 사방 네 개 탑으로 모두 다섯 개 탑 형태를 형성하고 있다. 바콩의 가람 배치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바콩의 가람 배치가 앙코르와트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모든 예술양식은 서로 영향을 주고 상호 보완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삼보 프레이 쿡에서 가장 큰 프라삿 타오(Prasat Tao·사자사원)에는 갈기를 세운 두 사자상이 있다. 첸라 시대의 조각품 중 가장 걸작으로 꼽힌다. 이후 수많은 사자상이 앙코르 유적지에 만들어지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유형에 따라 그 당시 시대상을 점치기도 한다. 사자가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앉아 있으면 평화의 시대였으며, 엉덩이를 들고 갈기를 세우고 있으면 전쟁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갈기를 세우고 뒷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는 두 마리 사자가 문 양옆을 지키고 있어 사자사원이라 이름 붙인 중앙사원 프라삿 타오는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일종의 국가 기도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원들의 특징은 그 소재가 붉은 벽돌이라는 점이다. 앙코르 유적지를 답사하며 저절로 얻어지는 게 있다면 벽돌을 소재로 한 사원과 돌을 소재로 한 사원이 있음을 구분하게 되는 일이다. 벽돌 사원은 앙코르와트 시대 이전, 돌 사원은 그 이후 시대로 나뉜다는 점이다. 이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구분된다. 그렇지만 벽돌로 쌓았건 돌로 쌓았건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같다. 신상을 모시거나 왕의 무덤으로 사원과 탑을 건축했다는 점이다. 아니면 신전과 무덤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나타내는 방법은 다르다. 앙코르와트 이전의 사원과 이후의 사원에 모셔진 신상이 다르듯 그 표현 방법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가장 손쉽게 그 시대 구분을 하는 방법으로 문설주 위에 설치된 린텔의 조각상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듯 조각을 설치한 재료에 따라서도 그 구분이 가능해진다.

돌은 그냥 돌에다가 음각이나 양각을 해 그릴 그림의 내용을 파 들어가면 되지만, 벽돌을 소재로 한 건축물의 경우는 따로 이 그림을 그릴 밑판을 만들어 붙여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회반죽을 주물럭거려 견고한 조각 틀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흙을 벽돌처럼 말리는 이 틀을 ‘홍토’라고도 부르고 ‘스터코(Stucco)’라고도 부른다.

이 홍토를 벽이나 양 문설주 위의 상방에 만드는 경우도 있고 그 위쪽의 공간에 만들어 붙이는 경우도 있다. 상방에 붙였다면 그냥 ‘린텔(lintel)’이라 불러도 좋겠지만 그 위쪽의 공간(대개 삼각형이 되지만)에 붙였다면 건축 용어로 ‘프론톤(Fronton)’이라 부른다. 어디에 붙여놓고 무엇을 조각하든지 간에 이 홍토가 견고해야 그 조각품이 오래갈 것은 당연한 이치다. 비록 철분이 많이 함유된 흙을 골라 썼다고는 하지만 진흙을 이겨 만든 이 회반죽이 얼마나 오래갈 것 같은가. 그런데 천년이 지난 지금도 이 회반죽은 고스란히 그 조각품을 품고 살아 있다. 신비한 기술이다. 학자들이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온갖 실험을 해 본 결과 개미집을 끓여서 흙과 함께 섞어서 그렇다는 재미난 발표를 한 적이 있다. 개미집 속에는 개미들의 분비물인 개미 침이 혼합돼 있어 그 어떤 강력접착제보다 강하고 영구적인 접착력을 가진다는 설이다. 그래서 신혼부부에게 축하의 의미로 머리 위에 쏘는 축포와 헤어스프레이에 개미집 가루를 섞어서 팔면 상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웃지 못할 신종 아이디어까지 현지에는 나돈다.

석공의 작품에는 숨겨진 보석 같은 주제가 숨겨져 있다. 무턱대고 쪼고 빚은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는 미적창조도 있지만 더 깊은 숨은 뜻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사자상에 대해선 이야기한 바 있다. 엉덩이를 치켜들고 꼬리를 내리고 있으면 공격자세로 국운이 흉흉할 때 만들어진 조각품들이고,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꼬리를 머리까지 올리고 있으면 태평성대를 상징한다. 갈기를 칼날처럼 세우고 있는 이 거대하고 사나운 모습의 사자상이 있는 프라삿 타오는 비상시국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 드물게 팔각형으로 돼 있는 탑이다. 드넓은 천장을 향해 올라가는 벽면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며 정점을 향하게 된다. 본시 지붕이 있었겠지만 허물어진 지붕 꼭대기에서부터 쏟아지는 햇살이 그 안에 안치된 링가를 비추고 있다. 묘한 각도로 종일 이 링가를 비추도록 뚫려 있다. 지붕 천장을 보니 이것도 다분히 계산된 설계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팔각의 벽은 이중으로 쌓았고 바깥벽에는 사방팔방 힌두신화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여기 있는 스터코 조각상들은 너무 많이 훼손돼 정확한 그림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이 이후의 사원들, 가령 바콩이나 반테이 스레이는 아직 훼손되지 않은 원형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여러 곳을 두루 다녀 봐야 전체 윤곽이 잡힌다.

오는 길에 캄퐁 끄데이 다리(Kampong Kdei Bridge)를 만났다. 천년의 다리로 알려진 이 다리는 프레아 쿡이 수도였을 당시 건설된 석교로 코끼리 부대가 이동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지금도 버스 두 대가 교행하고도 남을 정도의 폭을 자랑한다. 천 년 전 다리라지만 지금도 튼튼하다. 다리 양 난간을 장식한 거대한 ‘나가 형상 역시 별 손상 없이 건재하다. 아마도 이 다리를 통과한 코끼리 부대가 승전고를 울렸기 때문에 승리의 개선문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한다. 앙코르 톰 승리의 문 밖에 스핀 트마(Spean Thma)에도 이와 똑같은 다릿발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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