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38] 계명대 동산의료원 손수상 석좌교수와 이경외과 이미경 원장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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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9-08   |  발행일 2015-09-08 제23면   |  수정 2015-09-08
대구·경북 첫 여성 외과의사…‘금녀의 벽’ 깬 사제
[인연 .38] 계명대 동산의료원 손수상 석좌교수와 이경외과 이미경 원장
손수상 계명대 동산의료원 석좌교수(왼쪽)와 이미경 이경외과 원장이 이경외과 옥상의 정원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이미경 이경외과 원장(54)은 대구·경북지역의 첫 여성외과의사로 왕성한 진료활동을 펼쳐 주목받았다. 이 원장이 외과전문의가 된 것은 1991년. 그 당시만 해도 지역에서 외과의사는 금녀의 구역처럼 여겨졌다. 전국적으로도 여성 외과전문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수술이 많은 외과는 여성이 하기 힘들기 때문에 여성들이 쉽게 도전하지 않았고 의과대학에서도 체력이 약한 여성을 그리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1980년대 외과를 지망했을 때의 상황을 이 원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외과 레지던트를 지망하려니 남자 동료나 외과 교수님 상당수가 말렸습니다. 육체적 노동이나 수술의 어려움이 남자도 견디기 벅찰 정도인 데다 힘들게 외과를 수료해 외과전문의가 되어도 환자들이 수술을 받으러 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제 장래를 걱정해주며 하신 말씀이었지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그에게 희망을 준 사람이 바로 스승인 손수상 계명대 동산의료원 석좌교수(66)였다.

“제 어깨를 두드리며 ‘닥터 리, 잘 해낼 거다. 넌 늘 최고였으니 최고의 의사가 될 거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원장은 무더운 여름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를 맞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외과를 지망했지만 주위에서 너무나 반대가 거셌기 때문에 그의 결심이 점점 흔들리고 있었는데 이를 다잡도록 해준 분이 바로 손 교수였던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이 말을 들은 후 그의 결심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 李원장에게 孫교수는
80년대 초엔 외과 지망 여성 드물어
동료 등 주변 반대에 고민 했었지만
스승인 孫교수의 격려에 결심 굳혀
고된 업무 좌절할 때도 힘 북돋아줘
유방 전문의 된 것도 스승의 조언 덕

◇ 孫교수에게 李원장은
부드러움·추진력 두루 갖춘 제자
수련의 때 병명 확인안된 환자 보곤
며칠간 서적 뒤져 병명 찾아내 놀라
대학 남아 후진 양성하길 바랐지만
외과전문의로 전국 명성 얻어 대견


이 원장이 쉽지 않은 외과의사에 지원한 이유가 있었다.

“80년대 초 의과대학 시절, 손 교수님의 외과학 수업을 들었습니다. 손 교수님은 요점만 정확히 이야기하며 이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갔습니다. 덕분에 외과 강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떨칠 수 있었지요.”

80년대만 해도 외과의사는 ‘의사 중의 의사’ ‘의료의 꽃’이라 불렸다. 특히 동산의료원은 수술을 하는 외과의 활동이 두드러져 ‘동산외과’라고 부를 정도로 이 분야에서 최고의 병원으로 명성이 높았다. 물론 외과의사들의 자긍심도 상당했다고 한다.

외과에 대한 인기가 이렇게 높은데도 힘들기 때문에 여학생들이 이를 지원할 엄두를 잘 내지 못하던 시절에 이 원장은 겁 없이 외과전문의를 하려 했던 것이다. 손 교수의 명쾌한 강의와 함께 왠지 모를 외과의사에 대한 부러움이 그의 도전욕구에 불을 댕기게 했던 것이다. 응급실에 실려온 위독한 환자를 수술실로 데리고 가서 수술을 하고 나면 며칠 후 그 환자가 걸어다니고 그 뒤에 웃으며 퇴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외과의사가 가장 의사다운 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 원장은 귀띔했다. 그는 본과 4년 외과실습 때 손 교수를 더욱 존경하게 됐는데, 그때의 손 교수 모습을 ‘수술로 생명을 살리는 두 손과 지혜를 가진 거인’이라고 표현했다.

외과의사를 지망하고 나니 선배나 교수님들의 조언처럼 힘든 일이 거듭됐다. 절대량의 수면 부족과 고된 업무가 몇 년간 계속됐다. 특히 남성들이 주도권을 가진 분야에 여성이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들어갔으니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남성과 똑같이, 아니 남성의 두세 배의 일을 해야 했다는 것이 이 원장의 설명이다. 이렇다 보니 좌절할 때도 많았지만 이럴 때 늘 곁에 계시던 손 교수가 용기와 격려의 말을 해주고 여러 가지 지도, 안내 등도 해주었다.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손 교수가 이 원장이 외과를 선택하도록 도와준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인턴시절 이 원장을 봐왔던 손 교수는 이 원장이 똑똑한 데다 남성 못지않은 시원시원한 성격,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때는 외과가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지만 외과는 거칠면서도 섬세한 부분이 필요한 분야입니다. 그래서 여성도 필요할 것이란 생각을 하던 차에 이 원장을 보니 남성의 추진력, 여성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을 두루 갖춰, 이런 여성이 외과의사가 되면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원보다는 대학에 남아 활동하면 더 좋겠다는 욕심도 생겼지요.”

스승의 바람대로 이 원장은 대학에 남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병원을 개업해 남성들도 하기 힘든 많은 성과를 냈다는 말도 했다. 그래서 대학교수가 안 된 것이 아쉽지만 이 원장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원장은 의사로서 손 교수의 모습에도 매료됐다.

“손 교수님은 먼저 환자들을 잘 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골 노인이든, 청소하는 아저씨든,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두 손을 잡아가며 따뜻하게 진료하셨습니다.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요. 환자와 제자 모두의 이름을 기억하고 인적사항도 알고 계셨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정성이 그만큼 탁월하셨다는 뜻이겠지요.”

이 말끝에 이 원장은 우스갯말이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서 교수님 외래 진료실에는 참기름, 쌀, 복숭아 등 정성이 가득한 촌지(?)가 넘쳐났습니다.”

[인연 .38] 계명대 동산의료원 손수상 석좌교수와 이경외과 이미경 원장

손 교수는 뛰어난 경영인으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보여줬다. “경주동산병원장으로 계실 때 늘 적자였던 병원을 흑자로 돌려놨으며 의료노조와의 분쟁도 해결하는 등 뚜렷한 업적을 남겼지요.”

외과전문의를 마치고 1995년 일본 유학을 떠난 것도 손 교수의 조언 때문이었다. 일본에 가서 공부해 유방전문의가 되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조언이었는데, 스승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이 원장은 스승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그 당시만 해도 유방클리닉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은 없었는데 손 교수가 미래를 내다보고 제자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 이경외과 하면 유방클리닉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각 대학병원에 유방전문의처럼 세부 전문의가 생긴 것이 10년 전쯤 되는데, 저는 20년 전 이를 전문적으로 배웠으니 교수님이 10년을 앞서가도록 해주신 것이지요. 유학에서 돌아와 개원할 때도 교수님은 대구의 유명한 대학교수님이나 영향력 있는 의사분들에게 저를 일일이 데리고 다니며 ‘잘 봐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원장은 일본에서 돌아와 97년 대구에서 최초로 여성유방외과 전문클리닉을 개원했다. 당시에는 유방암 검진이 일상화되지 않아 이미 진행된 유방암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여성들이 많았다. 손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외과의사로서의 사명감을 키워온 이 원장은 “스승님의 말씀을 따르고 스승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제자가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진료했다”고 털어놨다.

이 원장의 성실성은 손 교수의 설명에서 잘 드러난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이 원장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손 교수는 고민 한 번 하지 않고 바로 ‘성실’과 ‘정직’이라고 말했다.

“80년대 한국에서, 그것도 대구라는 지방에서 여성이 외과를 지망하는 것은 보기 드물었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어려움 속에서도 크게 힘들어하는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진짜 열심히 진료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4년간의 외과 수련의 시절 쭉 이 원장을 봐왔는데 너무 성실했습니다. 이렇게 성실하다 보니 힘들다고 투정하거나 딴청을 피우거나 하는 일 없이 수련의 생활을 잘 해나갔습니다.”

손 교수는 이 말을 하면서 이 원장이 수련의를 하던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줬다.

“온몸이 괴사되는 병을 앓는 환자가 있었는데 모두 그 병명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원장이 며칠간 의학서적을 뒤져서 그 환자의 병명이 이것이 아니냐며 묻더군요. 이를 확인해줄 자료를 논문처럼 적어 와서 말입니다. 나중에 정확히 진료하니 이 원장이 말하던 병이 맞아서 그 성실성과 총명함에 다시 한번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손 교수는 이 말끝에 “수련의 시절 이 원장은 6개의 논문을 썼다. 육체적인 고달픔, 부족한 수면 등으로 논문을 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데 4년 동안 6개의 논문을 쓴 제자는 지금도 찾기 힘들다”는 말도 했다. 6개 중 4개의 논문은 손 교수와 함께 써서 이 원장에 대한 애정이 더욱 깊어졌다.

“이 원장을 보면 제자이지만 존경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제자를 둔 스승이라는 것이 뿌듯합니다. 대학에 남아 후진을 양성하는 보람이 이런 것이겠지요.”

인터뷰 내내 손 교수는 ‘인연’시리즈의 기사에서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이 원장의 이야기를 많이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원장이 그동안 지역 의료계에서 해온 성과가 자신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손 교수가 지역 의료계에 남긴 성과도 대단하다. 계명대 의과대학 부속 경주동산병원과 동산의료원 병원장은 물론 동산의료원장까지 지냈다. 동산의료원의 요직은 모두 거친 것이다. 이만이 아니다. 대구위암연구회 회장, 대한위암학회 회장, 국제외과학회 한국대표, 대한기독병원협회 회장 등도 역임했다. 현재는 대한암협회 경북지부장, 한국·카자흐스탄 친선협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손 교수는 이 원장이 20대였을 때부터 알아왔지만 인터뷰 도중 한 번도 제자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높임말을 썼다. 오랫동안 만났고 제자인데도 불구하고 제자에 대한 애정이 말 속에 깊이 녹아있는 것이다. 이 원장 역시 바쁜 진료 때문에 몸 편히 쉴 시간이 잘 없다고 말을 하면서도 스승을 만난다고 인터뷰 전날 녹차를 직접 우려서 냉녹차를 만들어왔다. 그러고는 인터뷰 내내 스승의 녹차 잔이 비었는지를 확인하고 수시로 두 손으로 공손히 차를 따랐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느낄 수 있었다. 사제지간의 정도 점점 사라져간다는 요즘, 이들을 보면서 이런 스승과 제자가 많아지면 세상이 더욱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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