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로펌에서 잘나가는 싱글 변호사인 연우는 지금 패닉 상태다. ‘남자는 백해무익’이라는 신조 아래 자신의 커리어 쌓기에만 여념이 없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구청직원을 남편(송승헌)으로 둔 아이 둘 딸린 평범한 아줌마로 살게 되어서다. 내막은 이렇다. 저승세계를 담당하는 한 직원의 실수로 일찍 죽음을 맞았고, 다시 살기 위해선 한 달간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연우는 그렇게 빼도박도 못하는 반전 인생을 시작한다.
언니가 돌아왔다. 현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민낯으로 연기의 디테일을 채우는 여배우이면서, 파격적 무대 의상도 여전히 자기 피부처럼 무난히 소화할 것 같은 섹시 디바 엄정화가 ‘미쓰 와이프’의 연우 캐릭터로 반가운 얼굴을 비쳤다. 연우는 코믹과 감정 연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엄정화에겐 맞춤옷 같다. 게다가 원톱에 가깝게 이야기를 끌고가야 하는 역할의 부담감에서도 자유로운 그녀에겐 딱인 캐릭터다.
썰렁한 농담도 잘 하는 편
내 경쟁력은 친근감인 듯
한달 새로운 삶 주어지면
송승헌씨나 발레리나로
살아보고 싶다
결혼?
하자는 사람이 안나타난다
가수 컴백계획 아직 없어
영화 ‘해운대’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데 이어 ‘오로라 공주’ ‘베스트셀러’ 등을 통해 원톱 여배우로서의 입지를 굳게 다진 그녀. 무엇보다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는 태생적 자신감이 엄정화를 지난 20년간 배우와 가수를 병행하면서도 살아남은 유일한 예능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연기가 고프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점에서 책임감이 따르겠지만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그리고 엄정화는 자신의 장기와 매력을 녹여낸 연우 캐릭터로 그 기대치를 한 단계 높였다.
▲연우는 연기의 진폭이 큰 캐릭터에서 장기를 발휘해 왔던 당신의 장점을 최적화시킨 캐릭터다. 어땠나.
“일단 여자의 성장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재밌고 신선했다. 나 스스로도 처음의 모습과 끝날 때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면서 기대됐고, 한편으론 연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인 만큼 내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사실 그게 제일 두렵고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과하거나 모자라면 어쩌지 하는 부담감. 하지만 여배우로서 이런 역을 만났다는 건 정말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잘 할 수 있는 모습들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기쁘게 마주한 영화다.”
▲이 작품을 선택한 계기라고도 볼 수 있겠다.
“맞다. 우선은 시나리오가 재밌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인물이었고, 영화 곳곳에 묻어있는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 어떤 부분이 나한테 좋게 다가왔다. 나도 그 감정을 만나보고 싶었다. 또 내가 여러 작품을 했지만 아이들과 정말 살갑게, 또 남편과 살갑게 지낼 수 있는 영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택하게 되었다. 게다가 여자가 전면에 부각되는 영화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부담감은 엄청 많았지만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고 잘 표현하면 예쁜 영화가 될 것 같았다.”
▲시종 웃음을 주고 감정을 끌어올리는 장면이 반복된다. 그런 극단의 감정을 오고가는 게 힘들지 않았나.
“힘들기보다는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초반 패닉상태에서 연우가 보여주는 모습들은 사실 배꼽을 잡을 만큼 크게 웃기는 장면은 아니었다. 그런 점 때문에 혹시나 유치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하는 궁금증과 의구심이 있었다. 중반 이후의 감정신에서도 마찬가지다. 매번 그런 의구심을 가지고 촬영에 임했던 것 같다. 그래도 시사회 반응이 좋아서 한숨 돌렸다.”
▲캐릭터는 어떻게 접근했나.
“캐릭터를 위해 뭔가를 특별히 준비하지는 않았다. 다만 처음에 등장하는 변호사 역할에는 신경을 썼다. 차갑고 빈틈 없는 여자,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연우는 어떤 모습의 여자일지 궁금했고, 그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아무튼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렇지만 패닉에 빠지는 역할이라 너무 자연스러워도 안 되는 중간의 경계선으로 임했다.”
▲송승헌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는데 어땠나.
“굉장히 좋았다. 아름다운 분이라 굉장히 신경이 쓰이긴 했다. 그렇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잘 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즐거웠다. 송승헌씨가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매 순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리고 호흡이 정말 좋았다. 편하고 배려를 많이 해주더라. 나도 모가 난 사람이 아니니까. 그냥 굉장히 즐거웠다. 서로의 연기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특히 극중 송승헌씨가 ‘생긴 것도 싫다고?’라면서 무릎을 꿇고 큰 눈망울로 얘기하는 장면은 정말 너무 재미있었다.”
▲항상 느끼지만 코믹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한다. 비결이 있나.
“내가 좀 진지하지 못하고 장난스러운 사람이라서 그런가 보다. 썰렁한 농담도 즐기는 편인데 그런 게 어색하지 않다. 코미디 영화라고 해도 촬영은 촬영인지라 고민은 많이 한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밝은 마음으로 촬영을 하기 때문에 즐겁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오버스럽지 않게, 또 즐겁게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엔도르핀이 생기는 것도 매력이다. 비결은 따로 없고 평소의 모습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면 자연스러운 코믹 연기가 나오는 것 같다.”
▲영화에서처럼 한 달의 새로운 삶이 주어진다면 발레리나와 바람기 많은 송승헌이 되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냥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송승헌씨로 살아보면 재밌을 것 같았다. 승헌씨가 되게 반듯한데, 실생활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 인물로 막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고 말한 건 (발레리나는) 무대 위에서 진짜 자기가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자기몸을 컨트롤한다. 그런 기분은 도대체 뭘지 궁금했다. 발레리나뿐 아니라 뛰어난 무용수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있다. 그런 그들의 삶을 살았을 때 어떤 기분일지, 또 얼마나 카타르시스가 생길지 궁금했다. 분명 속이 시원할 것 같다.”
▲93년 데뷔부터 쉼없이 여기까지 왔다. 가수로, 연기자로 성공을 이룬 흔치 않은 경우인데 그 동력을 뭐라고 생각하나.
“나 스스로도 가끔 생각해 본다. 내가 잘났다기보다는 진짜 운이 좋은 것 같다. 작품 운도 좋았고 감독님과 배우 운도 좋았다. 그게 나를 성장하게 만든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자신감도 한몫한 것 같다.
“두려움도 많다. 평소 꿈꾸는 그림이 있는데 내가 상을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그래, 너는 받을 만하다’며 축하해주는 거다. 굳이 상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작품이 나에게 주어질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지만 그런 기대감이 계속 생긴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것 같다. 절대 포기가 안 된다.”
▲이미 상을 많이 받지 않았나.
“그러게. (상을) 많이 받았더라. 그래도 계속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싶다. 난 욕심쟁이다.”(웃음)
▲스스로 생각하는 당신의 경쟁력은 뭔가.
“친근감? 대중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친근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또 나에 대한 고정관념이 많긴 하지만 거부반응이 별로 없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런 점을 대중이 좋아해 주는 것 같다.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 아는 체를 해주면 너무 좋다. 나도 반갑게 인사하고 그런다. 그만큼 나를 편하게 생각해 주는 거니까 고맙다.”
▲결혼은 안 하나.
“상대가 나타나야 진짜 결혼에 대해 고민해볼 것 같다. 결혼에 대해 닫힌 마음은 아닌데 이게 참 어렵다. 노력을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늦었나 싶을 때도 있는데 모르겠다. 문제는 결혼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솔직히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가정에 맞닥뜨려진다면 어떨까 하고 많이 상상도 해보고 촬영을 해나가면서는 이렇게 가정을 꾸미고 사는 것도 굉장히 행복하겠다는 걸 많이 느꼈다. 자식은 부모에게 사랑을 주고, 부모도 자식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준다. 그런 대상이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구나 하고 느꼈다.”
▲많은 남자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왔는데 그중 이상형은 없었나.
“내가 진짜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선지 지금껏 만난 상대 배우들 모두 정말 좋았다. 각자의 개성과 아우라가 있고 매력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번에 송승헌씨도 그렇고 내가 배우 운이 좋은 것 같다. 물론 그중 이상형도 있지만 그건 비밀이다.”(웃음)
▲여전히 예쁘다. 특히 극중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예뻤다.
“그랬나? 사실 난 예뻐 보여야 하는 장면에서 정말 자신이 없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고 내가 봐도 이상하다. 반면, 장난스럽거나 섹시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편하다.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도 섹시 콘셉트가 강하면 오히려 자신감이 생기고 신난다.”
▲예쁘다는 말보다 섹시하다는 말을 듣는 게 좋다는 얘긴가.
“칭찬은 뭐든 다 좋다. 그래도 섹시하다는 말이 좀더 듣기 좋은 것 같다.”(웃음)
▲연기에 대해 찬사도 이어지고 있다.
“배우는 그런 순간을 위해서 연기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건 신인이든 베테랑 배우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도 진짜의 감정을 만날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짜릿해진다. 그게 잔인한 감정이든, 슬픈 감정이든, 기쁜 감정이든 나를 통해 그런 감정이 제대로 느껴졌다면 배우로서 이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자다가도 웃을 일이다.”
▲혹시 나밖에 할 수 없다고 자신하는 역할이 있다면 뭔가.
“글쎄. 무섭도록 섹시한 역할?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려나.(웃음) 사실 엄마 역할이 잘 어울린다는 말이 무척 듣기 좋다.”
▲여배우에게 나이듦은 또 다른 의미일 것 같다.
“배우뿐만 아니라 여자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이듦보다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가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중이 기대하는 엄정화는 만능 엔터테이너다. 차츰 나이를 먹어가면 이에 부합되는 모습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런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자신감을 잃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때가 되면 스스로가 알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나는 아직 짱짱하다.”
▲가수로서의 활동계획은 없나.
“아직은 없다.”
▲앞서 말한 연기적 만족감은 언제 찾을 것 같나.
“모르겠다. 그게 나의 숙제다. 다만 이 일이 좋은 게 매번 주어지는 역할 하나하나가 새롭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면 나 스스로에게 기대하게 되는 것도 있는데 그런 과정들이 즐겁다. 연기적 만족감을 평생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대중에게 계속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튼 배우로 살아가는 지금이 나에겐 가장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김현수 dada245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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