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구미시 도개면 청화산 주륵사 폐탑지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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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8-14   |  발행일 2015-08-14 제36면   |  수정 2015-08-14
조각조각 해체된 절…폐허의 유적에서 ‘유린된 신체’가 느껴진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구미시 도개면 청화산 주륵사 폐탑지
주륵사 폐탑지.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탑의 부재와 초석들만 일부 남아 있다. 주륵사 폐탑지에 남아 있는 탑의 부재들. 옥개석의 크기로 보아 상당한 규모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구미시 도개면 청화산 주륵사 폐탑지
모례마을 골목길에 그려져 있는 불교 벽화들.



절터의 가운데 쌓인 탑부재들
불국사 석가탑에 견줄만한
웅장한 규모
유불교체 조선초기 폐사의 길

폐탑지 서쪽 청화산 아래에는
신라 불교 첫 전파지 모례마을

청화산(靑華山)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우거진 소나무 숲길, 쉬이 오르라고 계단도 마련되어 있지만 금세 숨 차는 된비알이다. 느릿하게 100여m, 몇 기의 무덤도 지난다. 그러자 자그맣게 열리는 땅. 무성하게 자란 풀숲 속에 초석들이 흩어져 있다. 그 가운데 석재의 부재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조각 선명한 커다란 지붕돌도 보인다. 이것은 탑의 무덤이다.

◆ 청화산 주륵사 폐탑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 청화산 자락에 신라의 절터가 있다. 주륵사(朱勒寺)다. 드러나 있는 터는 조그맣지만 원래 아주 큰 절이었다고 한다. 터의 가운데에 탑의 부재석들이 쌓여 있다. 이 파편들로 짐작해보건대 주륵사 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 또는 5층으로 쌓아 올린 8∼9세기 전형적인 신라의 석탑이라 했다.

커다란 옥개석 3개가 비스듬히 누워 있다. 두 개는 비교적 온전하고 하나는 깨져 있다. 추녀 선이 경쾌하다. 네 귀퉁이와 5단으로 조각된 옥개받침의 선이 아직도 시원하게 선명하다. 전각의 양 끝에는 풍령을 단 흔적이 남아 있다. 옥개석은 한 변의 길이가 2m가 넘는 웅장한 규모다. 이것은 불국사의 석가탑에 견줄 만하다고 한다.

탑의 오른편, 초석들이 흩어져 있는 곳은 금당터로 여겨진다. 초석 외에 와편과 계단의 소맷돌도 보인다. 석탑지의 동쪽, 건물의 기단 면석들과 층계석이 드러나 있는 곳에는 2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도 석축지가 남아 있는데 신라시대의 연화문 막새 기와편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혜각의 비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비편 하나 남아 있지 않다. 주륵사 터는 1968년에 조사되었다. 당시 맷돌의 하대석이 매몰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하지만 현재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주륵사는 조선시대 유불교체기 때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세종 11년인 1429년, 부사 이길배가 선산부의 남관을 수리하고자 이곳의 목재와 기와 사용을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그때 주륵사의 죽음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주륵사는 깨지고 깨어짐을 반복하며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주륵사의 부재로 보이는 주초석과 8각 석등재, 장대석 등은 다곡리에 있는 승유재에서 발견됐다. 주륵사지에 들어서 있는 선산김씨 문중의 5개 묘소 상석도 주륵사 탑의 일부라 한다.

통일 신라와 고려시대 불교는 사회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찬란한 유교 문화가 꽃피었고, 절의 자산은 유교문화의 향유자들에게 넘어갔다. 권력의 이동에는 피의 냄새가 있다. 주륵사 폐탑지에서, 어떤 아름다움도 없는 고적함만을 지닌 이 폐허의 유적에서, 유린된 신체를 느끼는 것은 과한 감상일까.

◆ 청화산

주륵사 폐탑지가 자리한 청화산은 원래 백마산이라 한다. 구미와 선산지역의 역사를 담은 일선지에 ‘백마산은 부(선산부)의 동쪽 25리에 있고 냉산이 북쪽으로 꺾여 이 산이 됐다. 일명은 화산(花山)이고 높이가 냉산과 비슷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주륵사는 백마산 아래에 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청산 또는 화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산의 골짜기에 청운동 마을이 있어 청산이라 했고, 화실이라는 마을이 있어 화산이라 하다가 어느새 청화산이 되었다고 말한다. 청화산은 돌이 많은 산이다. 돌은 많은데 산불이 잦은 산이라 한다. 그래서 청화산(靑華山)은 청화산(靑火山)이었는데, 산불이 잦아 ‘화(火)’를 ‘화(華)’로 바꾸었다고도 한다.

청화산의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너머가 냉산이다. 냉산에는 신라 최초의 가람이라는 도리사가 자리한다. 도개면은 청화산과 냉산이 병풍처럼 감싸안고 있는 땅이다. 그 땅이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파된 곳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구미시 도개면 청화산 주륵사 폐탑지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구미시 도개면 청화산 주륵사 폐탑지
아도화상이 숨어살았던 모례의 집 우물.

◆ 도개리 신라불교 초전지 모례마을

신라에 최초로 불교가 전해진 곳이 도개면 도개리 모례마을이다. 주륵사 폐탑지의 서쪽, 청화산 아래에 자리한 밝고 너른 마을이다. 신라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은 이 마을 사람 모례(毛禮)의 집에 굴을 파고 숨어살며 경전을 강론했다고 전한다. 현재 도개리는 ‘길 도’‘열 개’, 도개(道開)라 쓴다. 불도가 열렸다는 뜻이다.

모례는 큰 부자였다고 한다. 도리사의 창건도 모례의 시주로 이루어졌다는 사적비가 있다. 지금 모례마을에는 신라 불교초전기념관이 들어서 있고, 골목길에는 불교 벽화가 조성되어 있다. 기념관 앞에는 모례의 집에 있던 우물(전모례가정)이 아직 자리해 있다. 석재로 된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깊이는 3m이고 밑바닥에는 두꺼운 나무판자가 깔려 있다고 한다. 지금도 우물 속에 물이 고여 있다. 동네 어르신들은 이 우물 맛이 어느 우물보다도 맛 좋았다고 기억한다.

아도화상은 모례의 집에서 숨어 살았다. 주륵사 폐탑지가 자리한 다곡리의 골짜기에서 낮에는 소와 양을 쳤고, 밤이면 모례의 집에서 사람들을 모아 불법을 강론했다. 그렇게 3년. 굴을 파고 숨어 살아야 했을 만큼 신라 초기의 불교는 박해받았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이후 신라의 불교문화는 꽃피었다. 실로 찬란하게. 주륵사 역시 그 찬란한 꽃이었을 것이다. 꽃은 피고 진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정보

중부내륙고속도로 선산IC로 나가 도리사 방향으로 간다. 일선교를 지나 25번 국도 도개면 방향으로 가다 소보 방향 68번 길로 우회전해 조금 가면 도개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도개리 마을회관을 지나면 신라불교초전기념관이 있고 기념관 앞에 전모례가정이 위치한다. 68번 도로로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에 대항마을 표지석이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청화산 등산로 입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주륵사 폐탑 이정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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