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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댐 상류. 자호천의 물줄기가 영천호로 흐르며 너른 범람원을 이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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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리 일대의 인공 습지. 방치되어 있던 농지를 수질정화와 휴식공간을 위한 습지로 조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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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호를 가로지르는 삼귀교. 왼쪽 운주산의 지맥 속에 삼귀리가 안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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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 추모비.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정환직, 정용기 부자와 그 휘하 여러 장수들을 기리는 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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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댐 벚나무 길. 봄이면 벚꽃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곳이었나, 이곳이. 연분홍 꽃비 내리는 벚꽃 계절의 길과 광대한 적막으로 내려앉는 쌀쌀한 계절의 물이 아름답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뜨거운 계절의 자연이 이토록이나 찬란하고 신비스러우며 환상적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생각지 못한 풍경 앞에서 내내 멈춘다. 멈추어 오래 바라본다. 천이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곳, 영천댐 상류다.
댐이 들어서면서
마을들은 잠겼다
호수가 좁아진 곳
범람원 초지 사이
굽이치는 물줄기
그리고 데크길과
생명이 약동하는
작은 연못이 있다
◆ 삼귀교를 지나며
사람들로 와글와글한 영천댐 하류의 캠핑장을 지나자 길은 더없이 고요해진다. 산란한 빛에 영천호는 수묵 담채화 같은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망향 공원을 지난다. 댐이 세워지면서 물속에 잠긴 성곡리, 노항리, 삼귀리, 충효리 사람들의 그리움이 묻혀 있는 곳이다. 망향탑이 하늘로 고개 치켜들고 있다. 애써 물속을 보지 않겠다는 듯.
잠시 후 길가에 선 추모비 하나를 만난다. ‘산남의진’ 비다. 구한말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아 산남(조령 이남의 경상도 지역)의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정환직, 정용기 부자와 그 휘하 여러 용사들을 기리는 비다. 그 옆에는 독립운동가 정규식의 추모비가 있다. 몇몇 분들이 더위 속에서 주변을 정리하고 계신다.
점점 호수 건너편이 가까워지고, 물 위를 가로지르는 긴 다리가 보인다. 공학적인 미라 할 것은 없지만 간결하고 충실한 모양이다. 다리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삼귀. 다리는 삼귀교다. 다리 너머에 삼귀리가 있다. 운주산에서 뻗어 나온 지맥으로 둘러싸인 산촌, 마을의 지형이 거북이의 꼬리처럼 굽이져 있어 ‘구미’ 또는 ‘귀미’라고 불렸다는 마을이다. 상구미, 중구미, 하구미로 나뉘어 삼귀리가 되었지만 지금 하구미는 호수 속에 있다.
삼귀교를 지난다. 멈추어 길가의 경계석에 올라 바라본다. 어디선가 달콤한 꽃향기가 와락 풍겨온다. 삼귀리를 폭 껴안은 산이 모르는 섬처럼 아련하다. 호수는 점점 좁아지고, 초지가 펼쳐진다. 그 가운데를 물줄기가 굽이쳐 흐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본다. 자호천이다.
◆ 자양면 충효마을
보현산에서 시작된 자호천이 영천호가 되기 직전, 미련 같고 기대 같고 눈물 같은 범람원을 펼쳐 놓는다. 눈부신 초지와 신비로운 버드나무 군락과 유리 파편 같은 윤슬에 심장이 베인 듯, 움직일 수 없다. 몇 대의 차들이 비껴 달려가고, 희고 큰 새들이 유려하게 활공한다.
이곳은 자양면 충효리다. 산과 천과 호수, 모두를 가진 마을이다. 충효리는 이 마을 출신으로 산남의진 대장이었던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충효를 기리어 붙여진 이름이다. 1리의 대부분은 수몰되었다. 주민의 대다수가 마을을 떠났지만 일 년에 한 번 돌아와 만난다고 한다. 현재 마을을 지키는 이들은 9할이 80세 이상 노인들로 소소히 텃밭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2리에는 28명의 주민들이 복숭아와 사과를 키우며 살아간다. 마을회관 옆에는 정 부자의 재실인 충효재가 자리하고 있다. 당시의 격전을 함께 겪었던, 그리고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세운 것이라 한다.
◆ 생명의 땅, 영천댐 상류 인공습지
충효 마을의 끝자락, 천변의 초지 속에 데크 길과 작은 연못들이 보인다. 자호천이 구불구불 굽어 흐르며 만들어 놓은 작은 웅덩이들에 인공적인 손길을 더해 조성한 습지다. 웅덩이에는 연꽃이 식재되어 있다. 웅덩이와 웅덩이는 물길로 연결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관찰 데크가 이어져 있다. 산책로 곁에는 꽃밭인 초화원과 갈대미로원이 펼쳐진다. 때때로 꽃밭과 갈대밭 속에서 고라니와 눈 마주치기도 한다. 원래는 농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잡풀이 우거진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상수원 수질 개선과 휴식 공간 제공을 위해 생태공원으로 만들었다.
웅덩이들의 연결은 습지의 생태적 수질정화를 위해 비오톱 시스템을 적용했다. 비오톱은 다양한 생물종의 공동 서식장소를 의미하는데, 생태계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첫 번째 웅덩이는 침강저류지다. 자호천으로 유입되는 여러 오염물질들이 이곳에 가라앉는다. 이어 물은 물고기의 서식을 돕는 어류 비오톱, 철새들의 서식을 돕는 조류 비오톱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은 물에 포함된 토사를 가라앉히는 침사지다. 이렇게 생명의 작은 공간들을 거쳐 정화된 물은 흘러흘러 버드나무 군락을 키우고 초지를 적시며 호수로 간다. 비오톱(biotope)이란 그리스어로 생명을 뜻하는 비오스(bios)와 땅 또는 영역을 의미하는 토포스(topos)가 결합된 말이다. 생명의 땅. 이는 비단 이 습지의 시스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물이 멈춤 없이 흘러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움직인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포항고속도로 북영천IC로 나간다. 28번 국도 포항 방향으로 가다 임고 교차로에서 좌회전해 69번 지방도를 타고 죽장 방향으로 가면 영천댐이다. 호안도로는 영천 벚꽃 마라톤 대회 코스이며 포항 죽장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인공 습지가 자리한다. 습지의 산책로는 A코스 0.7㎞, B코스 1.3㎞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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