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감문면 삼성리 금효왕릉의 모습. 김천지역 구전에 따르면 금효왕은 감문국의 첫째 왕이거나 마지막 왕이다.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는 ‘말무덤’으로도 불리고 있다. |
<스토리 브리핑>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대장군 석우로(昔于老)는 서기 231년 김천지역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했다. 이후 신라는 진한지역의 소국(小國)을 규합하고 국운 융성의 기회를 마련했다.
반면 신라에 복속된 감문국은 1천700여년의 세월 속에 잊혔다. 하지만 김천 곳곳에는 감문국 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유적이 여럿 남아 옛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동부연당과 장부인릉 등의 감문국 유적이 잘 알려져 있지만,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의 금효왕릉(金孝王陵)에 가장 눈길이 간다.
이는 금효왕릉이 감문국 왕의 무덤이라는 구전이 김천지역에서 전해내려오기 때문인데, 김천의 옛 이름인 ‘금릉(金陵)’ 또한 금효왕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4편은 감문국 금효왕과 그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다.
김천 감문면 삼성리 구릉지에 위치
5∼6세기 조성추정 너비 15m 고분
감문국의 마지막 왕 무덤으로 구전
학계는 ‘신라 병합후 조성’에 무게
향토 사학계 ‘감문국 개령지’ 근거
"개령에 살던 김간의 역모 가담으로
고초겪던 후손이 조상 기록물 없애
감문국 관련 기록도 함께 사라진듯”
#‘말무덤’으로 알려진 고분(古墳)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에는 감문국 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금효왕릉이 있다. 이 오래된 무덤은 감문면사무소에서 삼성리로 향하는 도로변 인근 구릉지에 위치해 있다.
무덤은 6m 정도의 높이에 15m가량의 너비로 일반 봉분보다는 훨씬 큰 규모다. 경주의 거대한 왕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그 위용은 남다르다. 삼성리 출토 토기가 5~6세기의 것이기에 금효왕릉의 조성시기 또한 이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금효왕릉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무덤 남쪽에는 일반인의 무덤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금효왕릉이 위치한 삼성리 주민들조차 왕릉의 존재를 몰랐다.
주민들은 금효왕릉을 단지 ‘말(馬)’의 무덤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또한 감문국과 관련이 있다. 향토사학계는 ‘말무덤’이 지배세력의 무덤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말’이라는 음절은 ‘크다’는 의미가 있는데, 주민들이 말하는 ‘말무덤’이 ‘큰 수장의 무덤’이라는 주장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금효왕릉 인근 도로변에 안내판이 설치된 것이다. 금효왕을 비롯한 감문국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이 점차 높아질 것으로 기대되는 부분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김천 개령면의 선비 우준식이 쓴 감문국개령지 16페이지. ‘김간 역적기’ 때문에 불명예를 겪은 그의 후손들이 (개령)읍지의 기록을 없앴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
김천지역의 구전에 따르면 금효왕은 감문국의 마지막 왕, 또는 첫째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옛 문헌에 금효왕릉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만, 대부분 후대의 것으로 유적의 위치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금효왕과 장부인의 러브스토리 또한 감문국 멸망 한참 뒤인 조선 선비의 시 속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조선시대 지리서 신동국여지승람은 ‘현의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감문 금효왕릉이라고 전한다’고 기록했다. 지리서 조선환여승람에도 금효왕릉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감문국 금효왕릉이라 한다’며 무덤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학계는 금효왕릉의 감문국 유적설에 대해 다소 부정적 입장이다. 경북대 사학과 주보돈 교수는 금효왕릉을 신라 병합 이후 감문국의 영역을 다스리던 토착세력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 교수는 “(감문국이) 신라에 병합된 이후 토착세력이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경쟁적으로 큰 무덤을 조성했다”고 설명했다. 신라시대, 김천을 다스리던 감문국 지배층 후손들이 서라벌(경주)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조성한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강종훈 교수 또한 “금효왕릉이 옛 감문국의 영역에 파견된 신라인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금효왕릉의 감문국 유적설에 회의적 입장을 드러냈다.
반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와 관계없이 금효왕릉 자체가 감문국의 정체성을 상징한다는 의견도 있다. 계명대 사학과 발간 계명사학 제23집에 수록된 ‘고대 김천지방의 역사와 문화’라는 논문에 이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
논문은 “감문국 관련 유적과 전승이 그대로 남아 전하고 있다는 것은 그 진위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김천 개령면 지역민의 정체성이 고대의 독립국이었던 감문의 후예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단 금효왕릉이 감문국의 중심지인 개령면 일원이 아닌 감문면에 위치한 점은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고 밝혔다.
#개령면의 아픈 역사와 감문국
금효왕릉의 진위 논란은 감문국 유적에 관한 기록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불거졌다. 향토사학계는 감문국 관련 기록이 태부족인 이유로 김천시 개령면의 아픈 역사를 들고 있다. 개령면 일원에서 반란사건이 계속 이어졌고, 조정이나 문중에 의해 지역과 관련한 기록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것이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개령면 일원은 중앙정부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반골적 기질이 강했다. 이는 신라에 저항한 감문국 후손의 유전자가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천지역의 구전에 따르면 감문국 백성은 신라에 병합되기 전까지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중앙정부의 권위에 대항하는 개령면민의 성향이 신라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사건이 개령지역에서 일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개령들 일원에서 물자보급기지를 운영했고, 수많은 개령 주민이 부역자로 낙인찍혀 고초를 겪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뒤인 1600년(선조 33) 6월에는 개령 출신 길운절(吉雲節) 등이 제주도에 건너가 반란을 시도했다 미수로 끝난 적이 있다. 이 사건으로 개령현이 일시 폐현된 일이 있었다.
조선말기인 1862년(철종 13)에도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으로 인해 진주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이 민란의 여파가 개령까지 미쳤으며 일명 ‘개령민란’으로 불린다.
특히 감문국 관련 기록이 거의 다 사라진 데는 김간(생몰년대 미상)이라는 인물과 관련한 사건이 결정적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개령면의 선비 우준식이 쓴 향토지 감문국개령지에는 ‘김간’과 관련한 기록이 있다.
감문국개령지의 해당 내용을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찾아봐도 임진년(1592년) 이상은 자세하지 못하고 사관의 성명이나마 임진년 이후의 것뿐이니(중략) 이보다 더 자세한 개령읍지가 있었지만 약 100년 내외 전에 없앴다는 말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개령면에 살던 ○○김씨 조상이던 ‘김간 역적기’가 있으므로 항상 그 자손들의 불명예가 되므로 자손들이 읍지의 기록을 말소케 하고서 노력한 바 오래이다.”
감문국개령지를 보면 고려말인지 조선초인지 알 수 없지만 개령에 살던 김간이라는 사람이 역모에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고초를 겪던 김간의 후손들이 조상과 관련한 모든 기록물을 없앤 것으로 보인다.
향토사학계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감문국과 금효왕에 관한 기록이 함께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 위원은 “김간이 언제 난을 일으켰는지조차 기록이 없다. 조선초까지 남아있던 감문국 관련 기록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역사적 부침 탓인지 감문국개령지는 개령 사람들을 깐깐한 성품으로 묘사하고 있다. 개령지는 “자고로 개령사람은 근면해 재물을 쌓고 부를 얻는 데 능하니, 좀 지나치게 말하면 타향사람이 말하기를 개령사람이 앉은 자리 풀도 안 난다고 하니…”라며 개령지역이 겪은 아픔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글·사진=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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