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계의 허준…원두 볶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로스팅 일지를 썼다” (2)

  • 이춘호
  • |
  • 입력 2015-06-05   |  발행일 2015-06-05 제34면   |  수정 2015-06-05
상주서 ‘홍대급’ 커피가게 김민우씨
“나는 커피계의 허준…원두 볶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로스팅 일지를 썼다” (2)
김 사장은 직접 로스팅하고 드립한 원두커피를 자기 분신처럼 애지중지한다. 생두 로스팅의 감각은 곧바로 기타 연주로 이어진다.

커피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내 입을 사로잡은 맛
직장 그만둔 후 생계 수단 변신
지방 소도시에서
원두커피는 언감생심이던 시절
시행착오 거듭하며 실력을 쌓아
5천여만원짜리 독일제 프로밧 등
돈 버는 족족 기계 구입

‘커피 앤 티’라는 잡지에 소개
유명세 타며 잇단 러브콜 받기도

음악영화 한편에 감동
록밴드 급조…기타리스트 활약
가게 인기 프로그램 무료음악회

상주시 외서면 이촌리 일명 ‘잿마’란 동네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내 혓바닥은 새로운 맛 하나에 충격을 받는다. 조부가 나를 불러 감춰놓았던 커피믹서를 꺼내와 타주셨다. 상주 곶감보다 더 맛있었다. 하지만 조부는 더 이상 커피를 주지 않았다. 사먹기 위해 온갖 궁리를 했다.

어느 날 잡화를 파는 한 과부집을 찾았다. 그토록 찾던 커피가 선반에 금덩이처럼 얹혀 있었다. 쌀을 한 되 몰래 가져가서 동서커피로 바꿔먹었다. 커피는 내 가슴속 유토피아. 공부를 못해도 꾸중을 들어도 심심해도 괜찮았다. 커피를 타 마시면 만사형통이었다. 커피 덕분에 난 또래보다 더 빨리 겉멋이 든다.

상주공고에 들어갔다. 건축 관련 공부를 했다. 등하교 때 하모니카를 불며 다녔다. 대학은 성에 차지 않았다. 대학이 학문연마보다 밥벌이 수단이란 걸 알았다. 그렇다면 책만 읽어도 대학생보다 더 교양인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난 점점 상주에서 못 말리는 ‘할리우드 키드’로 굳어가고 있었다. 빈약한 내 상상력은 열기구처럼 정처없이 둥둥 떠다녔다. 고교 1학년 때 내게는 두 종류의 저금통이 있었다. 하나는 책, 다른 하나는 음악과 커피 구매용이었다.

“나는 커피계의 허준…원두 볶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로스팅 일지를 썼다” (2)
커피만으로는 삶의 아귀가 맞지 않았다.

짝을 찾아줄 필요가 있었다. 역시 커피 옆에는 음악이 절대적으로 절실했다. 기타를 배우기 위해 기타학원에 보름 정도 나갔는데 별로 배울 게 없었다. 내겐 ‘독학 본능’이 셌던 것 같다. 1번줄과 6번줄을 오르내리면서 멜로디와 리듬의 생리를 익혔다.

86년 난 너무나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음악 영화 한편을 발견하게 된다.

‘더 크로스로드(Crossroads)’인데 거기에 등장하는 조 새트리아니와 함께 세계 최고의 테크니컬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스티브 바이를 발견한다. 84년 영화 ‘베스트 키드’에도 출연했던 랄프 마치오가 블루스 뮤지션으로 등장하는데 그가 스티브 바이와 전자기타 배틀을 펼치던 광경은 내 심장을 활화산처럼 이글거리게 만들었다.

인생은 짧고 들어봐야 될 음악은 무궁무진했다. 대한민국 기타계의 강태공이 되고 싶었다.

23세 때 경북대 상주캠퍼스 등에 다니던 친구와 만나 록밴드를 급조했다. 그린힐 밴드와 커피 밴드였다.

난 입대 전후 잠시 구미의 한 설계사무소에 몸을 담았다. 일을 끝내고 자취방에 오면 별다른 휴식이 필요 없었다. 음악이 바로 휴식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계속 ‘기타 삼매경’을 갈구했다. 200여곡을 카피해서 원곡 비슷하게 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난 출근 전까지 기타를 치고 있었다. ‘기타 중독증’이었다. 입사한 지 몇 개월만에 기타와 회사를 병행하기 힘든 상황에 봉착한다. 바로 사직서를 냈다. 한국 최고의 기타맨이 될 수도 있겠다는 환상과 치기가 동시에 발동됐다. 내 앞에 얼마나 숱한 고수가 있는지 전혀 망각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젊은 날의 우쭐댐은 그 자체로 ‘특권’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일상이란 절벽 앞에 섰다. 직장을 잃고 나자 내가 애지중지하고 있던 커피가 내 생계를 지키는 ‘수호천사’로 돌변한다. 취미가 생계가 된다.

98년 내가 커피가게를 오픈할 때만 해도 시골 단위에서 원두커피를 먹는다는 건 언감생심. 설탕 많이 들어간 다방커피가 대세였다. 그런데 시골에서 로스터라니. 다방족 어르신에겐 내가 ‘UFO’로 보였을 것이다. 도시조차 바리스타 문화가 본격화되기 전인데 난 돈키호테처럼 로스팅부터 먼저 시작했다.

주위에선 난리가 났다.

내가 앞날이 보장된 건축사무실을 차 버리고 커피숍을 차린다고 하니 부모는 물론 지인들도 내가 티켓다방 주인이 된 줄로 착각했다.

아무튼 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누가 뭐라든지 상관없이 생두를 볶았다. 상주읍내에서 ‘그린힐’이란 상주의 첫 로스팅 하우스를 연다. 원래 거기는 레스카페였다. 음식과 술도 팔던 집인데 그걸 인수해 로스팅 하우스로 개조했다. 당시 상주에서 핸드드립 원두커피 맛을 아는 이가 몇 명이나 됐겠나. 맨땅에 헤딩하듯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갈아놓은 원두가루를 커피믹서로 착각한 손님이 ‘가루가 왜 물에 안 녹느냐’고 항의전화를 거는 촌극도 빈발했다. 그럴수록 난 사명감을 느꼈다. ‘촌동네에 원두커피문화를 보급한다’는 자부심 같은 것 말이다.

바리스타는 커피를 추출하는 전문가, 로스터는 생두 볶는 전문가. 대다수 바리스타를 거쳐 로스터가 되는데 나는 거꾸로 갔다. 난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결국 커피의 맛은 로스팅에서 결판이 난다’로 확신했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로스팅 기계를 살 수 없었다. 대량유통하는 곳으로부터 원두를 구입해서 팔았다.

1년 정도 있다가 700여만원짜리 로스팅 기계를 구입한다. 제대로 된 로스팅 양성 기관도 없었고 전문 서적도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서 고급 정보를 찾을 데가 없었다.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원두를 볶으면서 필요한 항목을 체크하기 위해 로스팅일지를 작성했다. 스스로 ‘커피계의 허준’이라고 여겼다. 가게 문을 연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별을 관측하듯 일지를 기록했다. 최고의 맛이 뭔지 사전 정보가 전무한 상태. 많이 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태울수록 실력이 늘어났다. 대구의 커피명가를 비롯해 외국 브랜드 커피숍의 원두를 갖고 와 비교 테스트를 했다. 초창기에는 만델린, 콜롬비아, 브라질 정도를 주물렀다.

이탈리아 정통 원두커피 모리나리와 일리, 미국발 스타벅스 등의 맛과 비교도 해봤다. 처음에는 내것과 맛이 비슷한 줄 알았다. 그런데 미묘한 차이가 났다. 나는 매일 맛이 들쭉날쭉했고 그쪽은 일정했다. 일정한 맛은 어떻게 가능할까? 아메리카노를 위한 원두 배합 비율도 마냥 궁금하기만 했다.

결국은 커피는 경력도 감각도 아니고 ‘과학’이었다. 감보다 ‘땀’이 더 중요하다. 로스팅할 때마다 로스팅 시간과 온도, 배출시간을 적었다. 이렇게 일지를 적지 않으면 맛이 일정하기 어렵다. 겨울하고 여름이 다르고, 우기와 맑은 날이 다르다. 그 제약조건을 감안해서 볶아야 한다. 도공의 가마 사용 테크닉과 비슷하다.

기계가 중요했다. 초창기에는 프라이팬, 수망 등을 이용해 빈티지 오디오 마니아처럼 손수 콩을 볶아봤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2000년대 후반 5천여만원의 독일제 프로밧을 구입했다. 그 외에도 영국제 1대, 이탈리아제 1대 , 국내산 2대 등 모두 7대를 구입했다. 돈을 버는 족족 기계를 샀다. 돈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꿈의 로스팅’ 때문이다. 많을 때는 하루 생두 5㎏를 10번 이상 볶는다. 20분 정도 예열한 뒤 220℃까지 올리고 그 다음 190℃ 정도로 내려갔을 때 생두를 투입한다. 자동은 곤란하다. 묵 쑤는 것처럼 곰탕을 끓이듯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 생두의 1차 클랙은 197℃에서 일어나고 2차 클랙은 228℃ 근처에서 일어난다. 클랙은 장작 타는 소리 같다. 이는 생두가 팽창하는 소리. 생두도 팝콘처럼 2배 이상 팽창한다. 일부 이탈리아 쪽에서는 2차 클랙까지 잘 안 가고 그 전에 배출한다. 미국 시애틀 스타일은 2차클랙을 선호한다. 이때 콩기름이 스며나오고 생두도 갈색으로 변한다. 오일이 조금 나오게 할 수도 있고 전혀 안 나오게 할 수도 있다. 나는 조금 나오게 한다. 모든 비율은 나만의 노하우.

많이 볶는 강배전은 내 스타일은 아니다. 커피는 그 지역의 기후와 토양의 기운을 먹고 자란다. 너무 볶으면 지역색이 증발해버린다. 기타처럼 로스팅도 수만번 반복연습을 통해 자기 스타일을 체득하게 된다. 자기만의 연주법, 자기만의 로스팅 기법이 탄생한다.

2005년 ‘커피 앤 티’라는 잡지에 내 가게가 소개된다. 그러면서 내 존재가 강호에 좀 알려진다. 매스컴의 위력은 역시 대단했다. 프랜차이즈 문의가 쇄도했다. 어떤 사람은 건물을 다 지어놓았으니 사장으로 오라고 간청했다. 고액 개인레슨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난 선을 그었다. 구속받고 싶지 않았다. 돈이 별로 안중에 없은 탓이다. 그냥 생두와 불의 함수관계, 로스팅는 끝을 확인하고 싶었다. 외부의 이런저런 제의에 다 응해주다 보면 ‘딴따라 로스터’로 추락할 것이다. 모든 제의를 다 거절했다.

로스팅에 지치면 심야에 일지를 정독한다.

구멍가게 외상장부 같은 그 노트를 보면 황홀하다. 지나온 내 삶이 수치로 다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한 밑천이 간절했다면 이 지긋지긋한 기록을 뭣하러 지속할까. 기록하려면 성실하고 진실해야 한다. 커피향이 곧 오늘 내 양심의 현주소. 내 양심을 계속 믿기에 조금이라도 탄 원두는 미련없이 버릴 수밖에. W3면에 계속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이미지 생성 AI '미드저니' 가이드 조남경

더보기 >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