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스릴러로 돌아온 손현주는 “시나리오만 좋다면 장르에 구애받고 싶지 않다”며 “언제까지나 연기자 손현주로 불리고 싶다”고 말했다. |
"그의 눈빛 연기를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 백운학 감독 -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대통령상 표창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의기양양했던 좀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대신 그의 얼굴을 감싼 건 온통 불안감과 암담함뿐이다. 강력반 최창식 반장. 특급 승진을 앞둔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납치해 살해하려는 낯선 사내와의 격투 도중 그를 우발적으로 살해한다. 머뭇거림 없이 바로 휴대폰을 꺼내 112 버튼을 누르려 하지만 그의 손은 떨리고 있고, 주마등처럼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갈등과 고뇌에 휩싸인 그 순간 경찰 서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벨소리. “내가 지금 누구와 만나고 있는 줄 알아? 본청 높으신 분들께 얘기 잘 해놨으니 넌 당분간 몸조심하고 있어.”
‘악의 연대기’는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고, 사건을 재구성하려는 최 반장의 심리적 갈등과 불안을 밀도있게 담아간다. 손현주가 잇단 스릴러 장르 출연으로 피로감이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악의 연대기’를 선택한 건 바로 기존 스릴러와 차별화된 이야기의 힘 때문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시나리오가 스크린을 통해 어떻게 표현될지 너무 궁금했다”는 손현주는 그렇게 잃을 게 너무 많아 스스로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최 반장이 되어갔다.
무엇보다 절제된 연기와 모든 희로애락이 담긴 눈빛을 지닌 손현주는 최 반장의 심리를 통해서만 관객과 소통되는 이 영화의 흐름에 딱 맞는 최적의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눈빛 연기를 생각할 때마다 아직 소름이 끼친다”는 백운학 감독의 말처럼 손현주는 이제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에서 누구보다 강렬하고 다소 파괴적인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시나리오를 읽은 느낌은 어땠나.
“굉장히 재밌었다. ‘숨바꼭질’ 때처럼 단숨에 읽혔다. 조금 진부한 이야기 같은데 속도감이 빨랐고 몰입도가 상당했다. 특히 대사와 지문 사이에 있는 여백을 메워가는 과정이 힘들어 보였지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최근작이 모두 스릴러 장르다.
“‘추적자’ 이후 스릴러 장르의 시나리오만 들어오고 있다. 차기작 ‘더 폰’도 스릴러다. 하지만 배우는 선택을 당하는 입장이다.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시나리오만 좋다면 아직까진 장르에 구애를 받고 싶지 않다.”
-‘추적자’는 당신의 연기인생에 전환점이 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맞다.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통해 조금씩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방점을 찍은 게 ‘추적자’다. 사실 ‘추적자’는 우여곡절이 많았던 작품이다. 라인업에 오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을 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KBS에선 공유가 출연하는 ‘빅’이 있었고, MBC에선 ‘빛과 그림자’가 이미 안정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는 중이었다. 도저히 틈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시작은 미미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처럼 모두가 죽기살기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의기투합했다. 박근형 선생님을 필두로 김상중씨, 김성령씨 등 많은 연기자가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열과 성을 다해주었기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숨바꼭질’로 흥행이 이어졌다.
“드라마 ‘쓰리 데이즈’ ‘황금의 제국’을 하다가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어서 선택한 게 ‘은밀하게 위대하게’다. 이때 기억이 좋았던 게 지금까지 주로 맞는 역할을 하다가 처음으로 때려봤다.(웃음) 그리고 나서 ‘숨박꼭질’에 출연했는데 시나리오가 정말 좋았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고 느꼈다. 게다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니 더 무서웠다. 고무적인 건 ‘숨바꼭질’이 당시 화제작이었던 ‘미스터 고’ ‘더 테러 라이브’ ‘감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흥행을 했다는 점이다. 사실 ‘숨바꼭질’도 충무로에선 묻힌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원래 변방에 있는 사람들이 더 열심히 한다. 적은 예산에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우리라도 열심히 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서로 격려했다.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중요하다는 걸 새삼 입증한 작품이다.”
촬영 땐 감독님 꼴도 보기 싫어
癌때문에 촬영 한 달 반 지연
완쾌되고 나니 우시더라
-이 영화에서 중점을 둔 건 뭔가.
“되도록이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시나리오는 이미 내 머리 속에 들어있지만 후반부의 감정과 줄거리는 일부러 기억에서 지웠다. 내가 너무 많이 알아버리면 관객에게 바로 들통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반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유지하고 싶었다.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그 반전을 나도 몰라야 했다.”
-캐릭터 접근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누구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더 외롭고 슬펐다. 감독님도 꼴보기 싫고.(웃음) 게다가 감독님은 녹록지 않은 주문을 아무렇지 않게 하셨다. 예를 들면 내 눈에서 분노, 슬픔, 회한, 배신 등의 감정이 느껴지도록 표현하라는 거다.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나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는 얘기니 기분은 좋았다.”
-최근 갑상선암 수술까지 받았다. 괜찮나.
“영화 촬영이 시작되는 시점에 갑상선암이 발견돼 수술을 했다. 나 때문에 한달반 정도 촬영이 늦춰졌다. 회복이 되자마자 촬영장으로 복귀했는데 모두가 다른 영화나 드라마의 스케줄을 안 잡고 나를 기다려줬다. 너무 고마웠다. 백운학 감독님은 나를 보자마자 우셨다.(웃음) 수술은 잘 됐다.”
-연기 잘하는 배우에서 흥행을 담보하는 스타가 됐다. 기분이 어떤가.
“‘스타’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솔직히 가장 두렵다. 그 순간 두려워서 다른 것을 못할 것 같다. 그냥 연기자, 또는 연기하는 손현주로만 불리고 싶다. 언제까지나.”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사진제공=호호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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