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세계] 에어컨 이전설치기사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4-08-15   |  발행일 2014-08-15 제36면   |  수정 2015-01-30
‘바람’이 불 때까지 비오듯 땀을 흘려야 하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이내 떠나야 하는 業
[직업의 세계] 에어컨 이전설치기사
18세 때 아르바이트로 이 일을 시작해서 올해로 벌써 20년째 에어컨 이전설치기사를 하고 있는 ‘모든에어컨’의 박중현씨. 대기업 AS센터 기사를 거쳐서 지금은 이삿짐센터나 블로그를 통해 알음알음 일거리를 받고 있다. 더울수록 바쁜 일이다 보니, 18세 이후로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직업의 세계] 에어컨 이전설치기사
1년 전부터 박중현씨 밑에서 에어컨 일을 배우고 있는 보조기사 이길우씨(34)가 에어컨 배관을 들고 부리나케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에어컨 이전 설치는 전문적인 분야라서 단기간에 기술을 배우기는 어렵다. 가장 중요한 것이 배관을 길이에 맞게 자르고 감싸는 기술과 배관이 통과할 수 있도록 벽에 구멍을 뚫는 기술인데, 이길우씨는 1년이 지나도록 벽 뚫는 일을 아직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직업의 세계] 에어컨 이전설치기사
박중현씨가 에어컨 설치를 끝내고 난 뒤 정상작동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

“내가 땀 흘린만큼 누군가는 시원해지는 業
에어컨 설치를 끝내고 버튼을 켜는 순간,
상상이 되나요? 그 기분 아무도 모를 것
땀이 흐를 때마다 나중에 올 시원함 상상”

“우리 각자는 사람들의 혼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로 오기 전에 있던 사람들의 혼합체, 바로 그 사람들의 콜라주다.” 시간의 흔적을 기록하는 프랑스의 현대미술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영위하는 일상은 직업들의 혼합물이다. 식당을 가고, 주유를 하고, 각종 생필품을 사고…. 우리는 일상의 모든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의 노동이 지금의 나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얽히고설킨 직업의 연계고리 속에서 지난 여름, 우리는 아마도 한번쯤 이들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100년 만의 더위라던 그 여름, 일하다가 도망갔던 아르바이트 소년

“1995년이었나? 하여튼 100년 만의 더위라고 전 세계가 난리였어요. 그때 어머니가 전자제품 대리점을 하고 계셨는데, 에어컨 설치해 달라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일손은 부족하지, 그러니까 저한테 아르바이트 좀 하라고.”

그런데, 그게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분명 기사님들 따라가서 고분고분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성질 급한 기사님들은 ‘일을 시켜야 하냐’며 화를 냈다. 일의 순서를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다가 시키기 전에 미리미리 필요한 연장들을 손바닥 위에 착착 올려놓으라는 것이다. 당시의 고참 기사들은 외과 수술실의 집도의처럼 각종 장비들을 쫙 펼쳐놓고 그에게 뛰어난 수간호사가 되길 요구했다. 생각해보라. 날은 덥지, 장비는 무겁지, 일은 모르겠지, 조금만 우왕좌왕해도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멍키스패너로 자꾸 머리는 툭툭 치지…. 한 며칠 따라다니다가 결국은 현장에서 도망쳐 버렸다.

“한 이틀 동안은 죽어도 안 가겠다고 버텼는데, 사흘째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어요. 제가 또 근성은 있는 놈이거든요. 괜히 오기도 생기고. 요즘은 그렇게 일 가르치면 버텨낼 사람 하나도 없어요. 덕분에 일은 제대로 배웠지만.”

일이 힘들어 일하다 말고 도망갔던 열여덟 살짜리 아르바이트 소년은 어느새 경력 20년의 수준급 기술을 가진 에어컨 기사가 됐다. ‘모든에어컨’의 박중현씨(38)가 그 주인공이다. 지금은 그가 아무 말 없이 손만 탁 내밀면 손바닥에 연장을 착착 얹어주는 보조 기사도 있다.

◆하루종일 에어컨을 만지지만 에어컨 바람은 쐴 수 없는 業

“제가 함부로 일을 안 시킵니다. 고객 집에서 연습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에어컨 기사들의 철칙이 한 번 봤던 손님은 두 번 다시 보지 말자는 겁니다. 설치가 잘 못돼서 가스가 누출되거나 물이 샌다거나 하면 또 가봐야 하니까. 그런 일 없도록 한 번 할 때 잘 해야 합니다.”

오늘은 112㎡(34평) 아파트에 스탠드와 벽걸이형의 2 IN 1 에어컨을 설치하는 날이다. 경력이 20년쯤 되면 집에 딱 들어서는 순간, 어디에 에어컨을 설치할 것인지는 바로 감이 온다. 에어컨 기사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확인하는 정도로 집주인과 시공협의를 마친 후, 본격적인 설치 작업이 시작됐다.

보조인 이길우씨가 아파트 마당에서 실내기와 실외기를 연결해줄 배관길이를 측정하고 준비하는 사이, 박중현씨는 배관이 지나갈 수 있도록 벽에 구멍을 뚫기 시작한다.

“무슨 공사해요? 난 또 어디서 천둥이 치나 하고 와봤지.”

이웃 할머니가 들여다볼 정도로 요란한 소리. 전동드릴을 가지고 콘크리트 벽에 지름 5~6.5㎝의 구멍을 하나 내고 나면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진다. 벽을 따라 지나가는 수십 m의 배관이 보기 흉하지 않도록 일정 길이마다 고정 장치를 해주는 것도 진땀나는 일이다.

에어컨 두 대를 설치하는 데 꼬박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아이고, 어디 에어컨 바람 좀 나오는 데 없을까?’ 너무 더워서 이런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드디어 반가운 소리가 들려온다.

“띠리링~” 에어컨 전원에 불 들어오는 소리!

이제야 살았구나 싶은데, 줄줄 흐르던 땀이 채 마르기도 전에 에어컨 기사는 이미 떠날 채비를 마쳤다.

“작동 잘 되네요. 바람도 시원하고. 우리는 또 다음 집에 가야죠.”

그렇다! 에어컨이 작동되면 그곳을 떠나야 하는 몹쓸 운명. 다음 집에도 분명히 에어컨은 있겠지만, 에어컨만 있을 뿐 ‘에어컨 바람’은 없을 것이다. 그 무용지물 에어컨에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까지 기사들은 또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야 할 것이다.

◆더 많이 땀 흘린 자가 더 시원한 바람을 느낀다

촬영이 있던 날은 1년 중 가장 덥다는 중복(中伏)이었다. 가만 있어도 견디기 어려운 날씨에 에어컨을 들었다 놨다, 선을 넣었다 뺐다, 앉았다 일어섰다, 기사들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제가 일 배울 때 우리 선배들은 발이 안 보이게 다니라고 했거든요. 저도 요즘 제 보조기사한테 그럽니다. 발이 안 보이게 다녀라!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설치가 다 끝나고 에어컨을 탁 켜는 순간…. 상상이 되세요? 그 기분은 아마 아무도 모를 겁니다. 땀이 줄줄 흐를 때마다 그 순간을 생각해요. 그럼 지금 좀 더 더워도 되겠다 싶어요. 더우면 더울수록 나중에 올 시원함을 더 크게 느낄 테니까.”

하지만 늘 이렇게 마인드컨트롤이 잘되는 건 아니다. 가뜩이나 더운데 열 받는 일들도 부지기수로 벌어진다. 때로는 설치비를 둘러싸고 고객과 언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공사를 다 해놓고 돈을 떼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박중현씨는 이런 생각을 한다고 했다.

“어쨌든 내가 땀 흘린 만큼 누군가가 시원해지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생각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져요. 뭔가 막 보람된 느낌이랄까.”

에어컨이란 게 리모컨만 있으면 작동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 이렇게 긴 배관이 연결돼 있고, 에어컨 기사, 자재상 등 무수한 사람이 그 에어컨 설치에 연결돼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새삼 놀랍다. 서서히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피부에 닿는 바람이 선선하다. 우리에게 가을은 여름날 땀 흘린 만큼, 그 만큼의 속도와 양으로 다가오고 있다.

글=이은임 방송작가 sophia9241@naver.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