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1> 해평면 낙산리 고분군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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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6-16   |  발행일 2014-06-16 제13면   |  수정 2021-06-15 17:12
우뚝 솟은 가야·신라 고분 200여기, 긴 취락의 역사 증명하듯…

◆시리즈를 시작하며... 

 

구미는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전해진 곳이고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꽃피운 곳이 구미다. 영남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인재의 본향이기도 하다. 고려말 충신인 야은 길재를 비롯해 영남사림의 영수인 김종직,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등 걸출한 인물들이 이 고장에서 태어나거나 거쳐갔다. 이들 모두는 한 시대의 역사를 이끌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구미의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품고 있는 곳이 낙동강이다. 구미를 관통하는 낙동강은 한민족 5천년 역사의 젖줄이자 문화의 원류다. 역사의 중심에 선 인물들과 고대 고분, 서원, 불교유적 등이 낙동강 물길을 따라 펼쳐져 있다. 그 역사와 문화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산재해 있다. 이야기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며 지역의 신성장동력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영남일보는 매주 1회 ‘스토리의 寶庫- 구미 낙동강 물길 따라’를 연재한다. 낙동강을 따라 펼쳐진 구미의 다양한 역사문화자원을 재조명해 지역의 관광산업에 기여하기 위해서다. 원고집필은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이하석 작가(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가 맡는다. 시리즈 첫 회는 낙동강 동쪽 구릉지대에 분포되어 있는 해평면 낙산리 고분군에 대한 이야기다. 낙산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당시 3차례에 걸쳐 조사됐지만 개괄적인 지표조사에 그쳤다. 1987년부터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박물관에서 본격적으로 조사한 결과 5~6세기경의 고분군으로 밝혀졌다. 일부 고분의 유물은 아쉽게도 도굴됐다. 

 

[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 해평면 낙산리 고분군
낙동강 동쪽 구릉지대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구미 해평면 낙산리 고분군. 발굴조사 결과 5~6세기경 고분으로,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205기에 달한다.
[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 해평면 낙산리 고분군
발굴당시 고분의 모습(위)과 출토된 부장품. <사진출처=문화재청>

 


#1. 기막힌 도굴꾼 이야기

구미지역에 고분이 많으니 이런 이야기도 나올 법하다.

땅꾼이라 불리는 고분 도굴꾼들의 이야기다. 오래 전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일로 풀어낸다.

ㄱ은 전문 도굴꾼으로 이름이 났다. 사실은 일본인으로서 조선의 유물에 빠삭한 상선(나카마 또는 장물아비)의 하수인에 불과했으나 도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났다. 상선의 정보 수집력은 알아줬는데, 일단 장소가 결정되면 도굴은 그가 맡아 해치웠다. 언덕 위나 비탈의 약간 평평한 곳이 옛 무덤자리이기 일쑤인데, 무덤의 개략적인 추정은 여러 가지 경험으로 알아낸다. 당연히 풍수지리도 알아야 한다.

“제법 큰 묘지지?”

상선은 기대를 갖고 ㄱ을 바라본다.

“그러네요. 상당한 실력자의 묫자리 같아요.”

상선은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잘 부탁하네.”

ㄱ은 긴 쇠꼬챙이를 꺼내어 몇 군데를 신중하게 찔러본다. 쇠꼬챙이 끝에 감각이 온다. 계속 돌인 듯하다. 잠시 무덤 자리를 살펴보다가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쇠꼬챙이를 다시 찔러본다. 그러다가 한 군데를 가리킨다.

“굴식돌방무덤(횡혈식고분)이군요. 이런 무덤은 옆으로 입구가 있어서 그리로 해서 널방(주실)으로 들어가지요. 여기가 그 입구쯤 되겠네요.”

ㄱ은 확신에 찬 소리로 말한다.

“꽤 넓게 돌이 덮여있는 걸로 봐서 주실과 따로 부장실을 둔 듯합니다. 당연히 많은 유물이 나올 듯싶네요.”

상선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일단 돌아갔다가 밤에 와서 작업을 하세.”

팔 자리를 표시하고는 상선은 먼저 언덕을 내려간다. ㄱ은 상선의 뒷모습을 보면서 입을 굳게 다문 채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주 못되먹은 놈!’이라고 그는 상선을 향해 속으로 욕을 한다. 벌써 몇 번째 꽤 괜찮은 물건들을 안겨주었으나 그 물건들만 어딘가로 빼돌린 채 감감무소식이다. 무덤 파는 건 누구나 꺼리는 일이라 작업을 끝내면 바로 수고비를 후히 쳐주는 게 관례인데, 이를 계속 어기고 다음에 한몫 쳐준다고 미루어온 것이다. 그 바람에 생계에 큰 타격이 오기도 했다. 이러다간 영영 돈을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해왔다. 지난 몇 번의 도굴에는 금동 관 비슷한 것과 칼, 그리고 금제 귀고리, 은팔찌 등이 나와 엄청난 값을 받았으리라 여겨지는데, 상선은 그 물건들의 처분을 어떻게 했는지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인 알기를 개나 돼지 보듯 하는 그의 태도가 영 아니꼽다.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그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그는 속이 뒤틀리기 일쑤였다. 언젠가는 큰 욕을 보이고 말겠다고 이를 악물기도 했다. 그런 차에 며칠 전에는 그가 곧 일본으로 돌아갈 거라는 말을 누가 귀띔해주어 불안하기 짝이 없다.

밤의 산골은 괴괴하다. 어디선가 늑대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봉분들 너머 얼핏 여우도 본 듯하다. 이 일대는 예부터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어서 저녁이면 인적이 끊어진다. 초저녁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상선은 그가 일을 하는 걸 잠시 보다가 자리를 뜨더니, 자정이 될 무렵에야 다시 돌아와 그를 지켜본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굴을 파 들어가서 드디어 석실의 입구에 다다른다. 제법 큰 돌이 입구를 막고 있다.

돌에 밧줄을 맨 다음 밖으로 나와 밧줄을 당겨 돌문을 연다. 밖에서 당기는 건 무덤 안의 나쁜 공기가 자칫 인체에 해를 주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고 한참을 밖에서 기다리며 막걸리를 마신다. 무덤의 입구가 열린 이상 큰일은 거의 한 셈이니, 무덤 안 공기가 다 빠져나가고 신선한 바깥 공기가 채워질 때까지 여유를 부린다. 혹시 뱀이라도 있을까 몰라 마른 풀을 모아 불을 피워 무덤 안으로 던져넣는다. 매캐한 연기가 굴에서 쏟아져 나온다.

이윽고 ㄱ은 굴을 지나 입구에서 전지를 비추어 실내를 살핀다. 토기들이 가득한 부장품실을 지나 더 들어가니 주실이다. 먼지 속에서 반짝이는 금붙이 같은 게 주실 바닥에 여기저기 있는 듯하다. 그중 하나를 주워든다. 금귀고리다. 그는 금귀고리와 옥장식들 몇 개를 얼른 챙겨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는 다른 금팔찌 하나를 주워서는 협소한 굴을 겨우 빠져나온다. 굴 입구의 땅 속에 금귀고리와 옥장식들을 얼른 숨긴 다음 그는 밖으로 나온다. 상선은 그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황급히 금팔찌를 받아들고는 자세히 살핀다. 그는 크게 흥분한 듯하다.

“이런 게 많은가?”

“제법 양이 많습니다. 뭐가 나올지 알 수 없을 만큼요.”

“네가 몇 개를 챙긴 건 아니겠지?”

상선은 그의 몸을 짐짓 훑어본다. ㄱ이 뜨악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상선은 이내 비굴하게 웃는다.

“상선님이 확인해 보시죠.”

“그래, 그래야지.”

상선은 굴로 들어간다. 늘 해오던 식이니, 이번에도 그런 것이다. 그가 몰래 챙기지 못하게 굴 안의 물건들을 확인해두려는 게다. 상선은 부장품들을 먼저 살핀 다음 기어서 사람이 겨우 앉을 만큼 협소한 주실로 들어가 사방에 불을 비춰 살피기 시작한다. 때맞춰 ㄱ은 굴 입구에 묻어둔 금귀고리와 옥장식들을 챙긴 다음 삽을 든다. 힘껏 굴 입구를 무너뜨려 흙으로 막아버린다. 안에서 상선의 고함이 희미하게 들리다가 굴을 완전히 막은 다음 흙을 더욱 두텁게 덮고 발로 밟아 단단히 다진 다음 큰 돌로 덮어버리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ㄱ은 바로 산을 내려온다. 그 이튿날 금귀고리와 옥장식들을 처분하여 제법 돈을 챙긴다음 서둘러 가족을 데리고 만주행 기차를 탄다.

그후 한참 세월이 흘러 1960년대 어느 날 한 도굴팀이 그 무덤을 도굴했다. 조폭들이 한 팀이 되어 있었는데, 이 팀의 상선이 여러 정보를 들어 이 무덤을 찍었고, 일본에서 들여온 탐지기를 이용하여 무덤 안의 사정을 어느 정도 추측했다. 이어 행동대원인 도굴꾼 몇이서 함께 도굴을 한 것이다. 굴을 파서 입구에 들어간 도굴꾼들은 무덤이 약간 변형이 된 걸 보며 이미 도굴이 된 것이라 크게 기대를 않고 들어갔다가 크게 놀랐다.

살은 썩고 뼈만 남은 이가 엎어져 있는데, 그 손에 전등이 들려 있었던 것이다. 도굴꾼들은 의논 끝에 그 뼈들을 밀쳐내고 그 아래 깔린 유물들을 대강 훑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굴 입구를 막아버렸다. 다시 세월이 흘러 모 대학에서 이 무덤을 비롯하여 인근의 고분들을 발굴할 때는 이미 무덤 안과 밖이 크게 훼손되어 버린 지 한참이 지난 상태였다.



#2. 낙동강 끼고 취락…낙산리 고분군 가장 유명

일제의 도굴이 하도 심했다고 해서 지어본 이야기다.

예부터 우리는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는 걸 꺼려왔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닥치는 대로 한반도의 무덤들을 파헤쳐 엄청난 유물들을 반출해갔다. 그때부터 도굴이 극성을 부렸다.

특히 1910년에서 30년대에 마구잡이식 도굴이 크게 행해졌다. 개성과 강화도 고분 도굴사건이 유명하다. 낙랑고분 도굴도 널리 알려졌다. 경상도 지역의 신라와 가야고분들 역시 거의 도굴을 당했다. 개를 끌고 다니며 냄새를 맡게 해 고분을 찾아내기도 했고, 규모가 크다 싶으면 사람들의 접근을 멀찌감치 막고,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서 무덤을 부숴버리기도 했다.

일본인들의 하수인으로 도굴에 참여했던 이들은 해방후 골동품 가게를 열어 도굴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면서 암암리에 도굴을 자행했다. 그러다가 60년대가 되면 다시 국내 도굴이 크게 성행한다. 그리하여 전국의 고분 99%가 도굴이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구미지역은 오랜 옛날부터 낙동강이라는 큰 강을 끼고 있어서 취락의 역사가 길다. 그로 인해 이 지역에는 고인돌(지석묘)과 고분들이 많다. 고인돌은 신석기시대에서 금석병용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거석(巨石)기념물이다. 구미지역의 고인돌은 도개면 신림리와 궁기리 지석묘군을 비롯해 해평면 낙산리·월호리, 고아읍 다식리, 선산읍 교리·생곡리·원리 등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가야와 신라시대의 고분들이 구미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선산읍 원리·독동리·상곡리와 무을면 송삼리, 옥성면 옥관리·구봉리, 도개면 다곡리·신곡리와 해평면 월호리·금호리·청림리·월곡리, 그리고 산동면, 장천면과 구미시 황상동·도량동·원평동 등에 많이 산재한다.

그중 해평면 낙산리 고분군이 유명하다. 90년 사적336호로 지정됐는데, 그 면적은 22만9천245㎡에 달한다. 구미시 해평면을 지나 일선교에 이르는 도로의 좌우에 대형봉토분들이 분포하는 걸 볼 수 있다. 낙산리 고분은 3개의 군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월파정산고분군, 정묘산고분군, 그리고 불로산고분군이 그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부 조사가 이루어지고, 87년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박물관에 의해 이 지역 고분군의 분포가 재조사됐다. 고분 20여기가 발굴됐다. 발굴 결과 이 고분들은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과 독널무덤(옹관묘), 덧널무덤(목곽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등으로 밝혀졌다. 굽다리접시, 손잡이잔, 항아리, 화로모양 토기 등과 쇠손칼, 쇠화살촉, 환두대도 등이 출토됐다. 89년 이 박물관에 의해 다시 몇 개의 묘가 발굴됐는데, 금제가는귀고리(세환이식), 유리 목걸이 등과 마구류, 쇠도끼 등이 출토됐다.

낙산리 고분들은 확인된 것만 해도 205기에 달한다. 봉토가 유실되거나 고분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것들까지 더하면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대부분 도굴된 상태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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