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소수자 위한 노동·인권 변호’ 民辯 대구지부 인권센터장 정재형 변호사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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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2-07   |  발행일 2014-02-07 제37면   |  수정 2014-03-21
변호사가 돈을 포기하면 할 일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 난, 세상을 향해 訴狀을 던지고 있다
20140207
정재형 변호사가 인권센터 사무실에서 판화가 이철수가 그린 그림 ‘새는 온몸으로 난다’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다.


영화 ‘변호인’의 열기가 식을 줄 모른다. 영화에서 보듯 주인공 송우석은 고졸이란 이유로 법조계에서 ‘왕따 아닌 왕따’로 취급받는다. 예전에는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법조인이 될 수 있었지만 대학진학률 80%가 넘는 현실에서 고졸이나 중졸·초졸출신 변호사는 가물에 콩 나듯하다.

2년 전 대구의 한 정책토론회 ‘교육이 고통이 된 나라’에서 ‘고졸이 행복한 나라’로 주제발표를 한 정재형 변호사(48)는 어느 누구보다 ‘고졸의 설움’을 절절이 겪은 인물이다. 그는 공고를 졸업하고 4년간 철강회사와 철공소, 자동차부품공장 등 현장에서 일하다 불합리한 차별을 딛고 야간대학에 진학해 4전5기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시험에 도전한 이유도 입신보다 부조리한 세상에 ‘소장(訴狀)’을 던지고 싶어서였다.

1998년 대구에서 개업을 한 그는 지금까지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위한 노동·인권변호사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고 있다. 지난해 12월10일 설립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구지부’(이하 민변·지부장 구인호)부설 인권센터의 센터장이기도 한 그는 대구민변의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변호사법 제1조에는 ‘변호사가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조개는 칼로 열고 변호사의 입은 돈으로 연다’는 영국속담처럼 진실을 밝히는 일보다 돈 버는 데만 주력하는 변호사가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지난달 설을 앞두고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인권센터에서 정 변호사를 만났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모습이 ‘변호인’의 주연배우 송강호를 연상케 했다. 그는 ‘헌신’이라는 말과 ‘인권변호사’란 말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터뷰를 허락했다.

-인권센터가 문을 열게 된 계기는.

“처음 ‘공익과 소수자인권센터’로 명명하려다 인권센터로 축약했다. 영세민, 이주민, 장애인, 성 소수자, 시국사범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법률로써 지원하고, 공익소송과 자문역할을 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대구민변이 그런 역할을 해 왔으나 컨트롤타워가 없어 시스템을 갖춰 좀 더 체계적으로 하고 싶어 지난해 말 독립했다. 예전에는 개인이나 단체가 개별적으로 변호사에게 요청했던 것을 인권센터 소속 변호사의 토론과 합의를 거쳐 소송을 하게 된다. 현재 24명의 변호사가 인권센터 소속이다. 대구지역 최대의 로펌이라 할 수 있겠다.”(웃음)

-서울, 부산 등 다른 지역에서도 민변 부설 인권센터가 있나.

“각 민변지부에서 하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독립적으로 소송사건만 따로 분리해 인권센터를 만든 것은 대구가 처음이다.”

-변호사법 제1조에 나와 있듯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는 게 사명이 아닌가.

“맞다. 인권센터 소속 변호사만 인권변호사이고 다른 변호사를 ‘물권변호사’라고 돌려세우고 인권을 독차지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무료로 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실비를 받는다. 센터의 간사 월급은 줘야 하지 않나. ‘의뢰인이 변호사를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대구시민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이용하는가가 중요하다. (053)752-0087, minbyun053@naver.com으로 연락해 달라.”


‘고졸의 설움’을 딛고
도시빈민 아들로 태어나
공고 졸업후 공장서 노동
불합리한 차별구조 회의
야간大 진학→司試 합격

법대에 간 계기는
‘법대생 친구가 있었으면’
전태일 평전 큰 감동
공대 꿈 접고 법 공부 결심

사회적 약자 변호 ‘외길’
과거 1년간 미국 체류 중
변호사 참 역할 깊은 인식
판사 아내 성원도 한몫

-대구민변이 올해 창립 10주년이라고 들었다. 어떤 계기로 창립에 참여하게 됐나.

“진보적인 생각과 뜻을 같이하는 선후배 동료들과 개별적 이슈로 만날 게 아니라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고 싶었다. 서울·부산·광주·대전에 이어 다섯 번째로 출범하게 됐다. 민변은 대한변호사협회와 달리 임의단체다. 민변이 하나의 정치세력이 됐다고 색깔을 입히는 사람이 있는데 민변 회원 간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동서붕당이 될 때 율곡이 서인을 옹호했는데, 당시 서인은 동인에 비해 약자였다. 기득권을 갖고 강자 쪽에 서 있는 변호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참여정부 때 ‘민변이 청와대를 접수했다’는 등의 말이 나왔는데 기실 민변은 참여정부에 가장 비판적이었다.”

-개업 후 노동사건 변론을 주로 다뤘다고 들었다.

“일반사건보다 상대적으로 노동사건, 시국사건을 많이 맡았다. 변호사업계에서 농담 삼아 골치 아프다고 기피하는 사건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노동조합사건이다.”

-노동사건과 소수자인권보호를 위해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게 된 동기는.

“2009년 가족과 함께 미국에 1년여간 머무르는 동안 변호사란 직업에 대해 성찰할 기회가 있었다. 재미난 것은 유명세를 탄 사건이 기억나는 게 아니라 퇴직금 200만원을 받아달라는 노동자나 밀린 월급 100달러를 받고 싶다는 이주노동자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더라. 돈을 많이 버는 변호사보다 세상을 향해 ‘소장’을 던질 수 있는 법률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경제적 이익만 포기하면 할 일이 더 많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인권센터를 열었고 센터장을 맡게 됐다.”

정 변호사는 자신이 이렇게 ‘놀 수 있는 것(?)’도 모두 아내 덕이라고 겸손해했다. 그의 부인은 현재 창원지법 서영애 부장판사다. 서 판사는 지난해 경남변호사회가 창원지법과 부산고법 창원재판부 판사들을 상대로 한 평가에서 우수법관에 선정되기도 했다. 서 판사는 97년 정 변호사와 연애결혼해 1남2녀를 두고 있다.

-공고를 졸업하고 바로 사회생활을 했는데.

“60년대 도시빈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3남2녀 중 대학문턱을 유일하게 밟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막노동, 어머니는 시장좌판에서 일하면서 우리를 키웠다. 옛날엔 첫째가 돈 벌어 둘째 공부시키고, 다시 둘째가 돈 벌어 동생 공부시키는 그런 구조가 아니었나. 배불리 먹을 수 없었고 학비가 늘 부담이 됐다. 70~80년대까지는 공고가 괜찮았다. 특히 내가 다녔던 대중금속공고는 우수한 학생이 많았다.”

-무슨 과를 선택했나. 또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처음부터 취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나.

“재련과에 다녔다. 재련은 광산에서 철광석을 캐서 핫코일이나 철판 등을 만드는 중간 과정이다. 학교 다닐 때 아버지 직업란에 ‘막노동’이라 쓸 수 없어 비워둔 게 마음에 걸렸다. 진학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우선 취직부터 하자 싶었다. 83년 창원에 있는 삼미특수강(현 포스코 특수강)에 입사해 하루 4천원의 일당을 받았다. 3교대 근무를 했는데 월급이 10만원 정도였다. 자취비용 2만5천원을 빼면 7만5천원으로 한 달을 살았다.”

-왜 그만뒀나.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야간 특근을 했는데 너무 힘들더라. 병역특례를 받으려면 8년을 근무해야 하는데 중이염으로 병역면제를 받았으니 더 머무를 이유도 없었다. 또 이 월급을 받고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암담하더라.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고졸과 대졸의 임금격차였다. 우연히 30대 초반의 관리과장 월급명세표를 본 적이 있는데, 30만원이 훨씬 넘더라. 그는 승진도 할 거고 근로조건도 나아지겠지만 내 급여와 작업환경은 나아질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두고 무슨 일을 했나.

“85년 대구로 와서 침산동 3공단 철공소에서 6개월간 일했다. 압연기능사자격증이 있고 철강회사 근무경력이 있어 그해 11월 대우자동차부품회사(현 한국델파이)에 공채 1기로 입사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20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87년 6월 야간통근버스를 타고 일하러 가다 6·29선언 소식을 들었다. 당시 노동계에도 민주화바람이 많이 불었다.”

-대우자동차부품회사를 그만 둔 이유는.

“당시 직장에 노동조합이 없고 노사협의체가 있었는데 근로조건개선과 관련해 합의한 결과가 조삼모사(朝三暮四)였다. 도저히 결과를 수긍할 수 없어 밤새 고민하다 이튿날 A3용지에 불합리한 근로조건개선안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조목조목 썼다. 그런 다음 40부를 복사해 공장입구와 식당 등지에 대자보를 붙였다.”

-결과는 어땠나.

“사측의 설득과 회유, 협박이 이어졌다. 현장을 잘 아는 노무과 간부가 ‘자네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타박하더라. 인사과에선 ‘행동이 잘못 됐으니 책임을 져야한다’고 했다. 당시 인사과 계장과 과장 둘 다 법대 출신으로 법전을 펴놓고 설득을 하는데 논리가 안 맞더라. 전태일 평전에 보면 전태일이 ‘법대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한 글이 나온다. 그전까지만 해도 대학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공대에 가려고 했는데 면담과정에서 법대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일하면서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EBS방송교재를 이용해 공부했다. 시험 삼아 영남대 법학과 야간에 지원했는데 합격됐다. 가장 기뻐한 건 물론 어머니였다. 낮에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 논공에서 경산까지 버스를 타고 가 공부를 했다. 체력적으로 파김치가 됐다. 형님이 보다 못해 학비를 대 줄테니 공부에 전념하라고 해서 회사를 그만뒀다.”(정 변호사는 4년간 전면장학금을 받으며 수석으로 졸업했다)

-노동현장에서 일한 경험이 법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됐나.

“1학년 때 노동법강의를 듣고 실망했다. 대학에 간 게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래도 대학졸업이란 타이틀은 따야겠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2학년 때 멘토였던 한 교수께 ‘노동법을 전공해 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실력대로 교수가 되는 게 아니고 받쳐주는 사람이나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며 ‘사법시험을 준비해라’고 하더라. ‘그러면 교수도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교수가 됐나.

“2008년부터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겸임교수를 하니 교수가 된 것 아닌가.”(웃음)

-보건학 석사학위까지 했던데.

“노동사건 중에 그나마 돈이 되는 건 산재사건이다. 산재사건을 대구에서 가장 많이 맡은 것 같다. 2002년 이주노동자의 건강 관련 특성과 의료이용실태에 관한 논문을 썼다. 업무와 연관해 좀 더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싶어서 공부를 더 하게 됐다.”

-‘고졸생태계’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별을 몸소 체험한 케이스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 고통이 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사회의 심각한 모순 중 하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대학 앞으로 줄서는 것’과 ‘대학 나와서 제구실 못하는 것’이다. 학력은 곧 실력이란 잘못된 풍조로 학력콤플렉스를 양산해왔다. 하지만 옛날엔 고졸·중졸·초졸자가 성공하면 신문에 날 장도로 신격화됐는데 요즘은 대학을 나와도 ‘별볼일’ 없는 시대가 됐다. 우리사회의 일자리 분포는 피라미드형이지만 학력분포는 역피라미드형으로 ‘다윗의 별’형태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선 공적영역에서 고졸채용할당제가 시행돼야 하고 고졸우대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20140207

1966 김천 출생 / 84 대중금속공고 졸업 / 92 영남대 법학과 졸업 / 2002 경북대 보건대학원 졸업 / 83~85 삼미종합특수강 근무 / 85~88 대우자동차부품주식회사 근무 / 95 사법시험 합격 / 98 변호사 정재형 법률사무소 운영 / 2010~2012 민변대구지부장 / 現 민변 부설 인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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