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스님 ‘울산학춤’ 창안·전승 외길인생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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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1-17   |  발행일 2014-01-17 제36면   |  수정 2014-03-21
“스님이 왜 체통없이 춤을 추냐고요?…난 추지 않으면 안될 팔자라오”
백성스님 ‘울산학춤’ 창안·전승 외길인생
울산학춤 창시자 백성스님이 학춤을 추고 있다.

우리말로 두루미인 학은 백로, 황새, 왜가리와 구분되는 겨울철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생긴 모습이 비슷해 헷갈리기 십상이다. 낙동강 중·하류지역 습지에는 예로부터 학(鶴)이 많았다. 특히 낙동강 해평습지와 낙동강과 금호강 두물머리 일대, 달성습지와 을숙도 등지는 매년 10월 하순이면 수만 마리의 두루미가 찾아와 장관을 이뤘다.

두루미는 이듬해 3월 초순까지 낙동강 중·하류지역에서 겨울을 나거나 일본 남부로 이동했다.

한반도에 도래하는 두루미는 3종이다. 온 몸이 흰색인 가운데 정수리에 붉은 반점이 있어 단정학(丹頂鶴)이라고도 불리는 두루미, 회색빛을 띠고 있는 재두루미, 검은색을 띤 흑두루미 등이다. 이 가운데 단정학이 가장 덩치가 크고 기품이 있으며 잘 생겼다.


 

4代째 이어온 ‘전통춤 집안’
出家후 제대로 된 학춤 추려
경북대서 두루미 연구 매진
“새는 신과 인간 잇는 가교役
울산·양산학춤 문화재 소망”

 

 

조선의 선비들은 이 단정학을 좋아했다. 선산의 선비 고산 황기로는 낙동강변에 매학정이란 정자를 짓고 학을 키우기도 했다. 학의 모습이나 행동을 춤으로 표현하는 학춤도 생겨났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학춤은 동래, 양산, 울산 등지에서 유래한다.

대구 신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옛 백사부리와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강정, 다사 일대는 옛날 수천 마리의 학이 도래한 곳이다. 낙동강의 가장 큰 지류인 금호강을 낀 대구에서 학춤이 전승되지 않은 건 의아한 일이다. 다만 조선 세종 때 대구군수였던 청백리 금유(琴柔)가 건립한 금학루(琴鶴樓)란 명칭이 남아있기도 하다.

울산학춤 창시자 백성스님(속명 김성수)은 대구와 인연이 깊다. 그는 2003년 경북대 생물학과에서 ‘신천의 뱁새’로 석사학위를, 2011년 ‘울산 태화강에 도래하는 떼까마귀와 백로의 기상변화에 따른 행동변화’로 박사학위를 땄다.

그는 공부하는 스님으로도 유명하다. 1972학번으로, 부경대 전신인 부산수산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한 회사에서 실험실장을 하다 81년 불가에 귀의했다. 수행 생활 중 동국대에서 한국음악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다시 불교학과에 들어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또 안동대 민속학과 박사과정도 수료하는 등 학문연구에 끝없이 정진했다.

백성스님이 이처럼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두루 통섭하고 학문연구에 열정을 쏟아부은 이유는 오로지 제대로 된 학춤을 추기 위해서였다.

백성스님 ‘울산학춤’ 창안·전승 외길인생
2009년 7월 백성스님이 경북대 조류생태환경연구소에서 사육하고 있는 두루미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경북대 생물학과에 입학해 조류학(鳥類學)을 전공한 것은 두루미를 포함한 다양한 새의 생태와 행동을 앎으로써 인문학에 융합시키고, 결국 춤이란 예술적 행위로 승화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에겐 두루미의 걸음과 표정 하나하나가 다 연구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지도교수였던 박희천 경북대 조류생태환경연구소장과 함께 일본의 구시로, 오카아먀, 이즈미 등지를 돌아다니며 두루미의 생태에 대해 연구했다. 또 구미에 있는 조류생태환경연구소에서 직접 두루미를 키우며 새끼 때부터 성조가 될 때까지 일거수일투족 섬세하게 관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학의 행동과 태도를 춤사위에 응용했다.

백성스님이 춤에 몰입한 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DNA 때문이다. 증조부와 조부, 아버지가 다 춤의 대가였다. 특히 아버지인 김덕명옹(90)은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보유자이면서 ‘양산학춤’ 기능보유자다. 그가 춤을 춘 것은 어쩌면 필연이라 할 수 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춤을 췄으니 40년이 됐다. 대학시절 축제 때 단골로 불려나가는 춤꾼이었다. 통도사로 출가한 이유도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지만, 사찰에서 전승돼 온 양산학춤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한때 수행에 방해가 될 것 같아 포기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산중에서 강원 과정을 끝내고 별자 소임시절 사찰 행사에서 학춤을 췄는데, 신도 한 명이 ‘스님이 왜 체통머리 없이 춤을 추냐’고 하더군요. 그 말에 상처를 받아 의상을 불태우고 다신 춤을 안 추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 사실을 알고 ‘넌 춤을 추지 않으면 안 될 팔자’라며 학춤 의상을 다시 마련해 주더군요.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는 4대째 양산학춤을 이어오다 97년 울산학춤이란 새로운 학춤을 창작했다.

“울산학춤은 신라 효공왕(901) 때 계변천신(戒邊天神) 설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경상도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보면 울산군은 본래 계변성(戒邊城)이었는데, 효공왕 때 신학성(神鶴城)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해요. 그 이유는 학 두 마리가 금으로 된 신상(神像)을 물고 계변성 신두산에서 우는 것을 지역백성이 기이하게 여겨 학성이라 한 데서 연유했답니다. 울산의 옛 이름이 학성 아닙니까. 이 밖에 학산, 회학, 비학, 무학 등 울산에는 다른 지역과 달리 학과 관련한 지명이 많습니다.” 울산학춤을 창시한 이유가 지역에서 전해 내려 온 학과 관련한 설화 때문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그는 기존 동래학춤, 양산학춤과 달리 울산학춤만의 상징을 만들었다. 형태적으로 갓의 꼭대기 부분에 단정학처럼 붉은 천을 붙였다. 또 금신상을 상징해 총(머리) 둘레에 금색으로 된 줄을 둘렀다.

백성스님은 지금까지 초파일, 개산대제 등 사찰행사는 물론 49재 등 일반 개인의 예식까지 포함해 1천회 가까이 학춤을 공연했다.

“학춤 말고도 우리나라엔 두꺼비춤, 사자춤, 곰춤 등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옛날 사람들은 학이 높이 날아오르기 때문에 무병장수와 발복을 기원하며 학으로 하여금 하늘에 그 소망을 전달해 달라고 기원했습니다. 새는 신과 인간을 잇는 가교역할을 한다고 믿었지요.”

하지만 민속학춤인 울산학춤과 양산학춤은 문화재 비지정상태다. 대신 탈 학춤 중 궁중학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0호로, 민속학춤인 동래학춤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그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학춤이 이용되는 걸 못마땅해 하면서 하루 속히 양산학춤과 울산학춤이 문화재로 등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사로운 욕심을 갖고 문화재로 등재하자고 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제가 가정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숨겨놓은 재산이 있습니까. 한국에서 학춤에 대한 이론과 기능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으면 중국에 문화재를 뺏겨도 할 말을 할 수 없게 돼요.”

그는 지금까지 18명의 울산학춤 제자를 두고 있다. 이 중에는 울산학춤으로 박사학위를 딴 제자도 2명이나 있다. 그는 특강이나 학춤을 춰 받은 사례금으로 제자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제자의 아이가 중·고등학교 및 대학에 진학할 때마다 50만원을 책정해 지금까지 실천해오고 있다.

“전통 학춤 문화에 씨를 뿌린다는 심정으로 학춤을 계승·발전시키려고 합니다. 제가 못 이루면 후대에 제자들이 하겠지요. 허허허.”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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